제목 | [구약] 창세기, 이게 궁금해요: 하느님은 왜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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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4 | 조회수6,162 | 추천수0 | |
[창세기, 이게 궁금해요] 하느님은 왜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나요?
*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기꺼이 받으시고 카인의 제사는 굽어보지 않으십니다. 카인이 특별히 잘못한 것 같지 않은데, 왜 그러셨을까요? 또 동생을 죽인 카인에게 영원히 저주를 내리시지 않고, 표를 찍어서 누구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신 이유도 궁금합니다(30대 루시아 님).
창세기를 읽을 때 자주 부딪치는 대목입니다. 선악과 문제처럼 여기서도 하느님께서 갈등의 씨를 뿌려 놓으신 것 같아 왠지 마음이 찜찜합니다. 공평하고 사랑이 많으신 하느님께서 그리 하셨으리라 믿고 싶지 않으니까요. 뭔가 합리적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럴듯한 동기를 알고 싶으신 거죠?
사람들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뒤에 어떻게 살았는지, 창세 4장은 처음으로 보여 줍니다. 첫 번째 사건은 놀랍게도 아들의 출생입니다. 출산은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하느님의 특별한 복입니다. 동산 밖에서도 하느님의 강복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두 아들(카인과 아벨)은 장성하여 농부(카인)와 양치기(아벨)로 살아갑니다. 농경과 목축은 인류가 정착한 뒤 취한 주된 생활양식입니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나요?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아들 대에 벌써 농경과 목축이 등장하다니요. 게다가 카인의 아내라든가, 카인을 죽이려 하는 자들이라든가, 카인이 세운 성읍까지 나타나다니요. 이를 보면 카인 이야기의 배경은 인구가 늘고 문명이 발전한 후대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편집자가 아담과 하와 이야기에 카인 이야기를 붙이면서 본래의 성격이 바뀐 듯합니다. 그러니까 ‘카인의 아내’ 등의 걸림돌에 너무 매이지 마십시오. 이야기꾼은 맥락으로 본문을 이해하기를 바라니까요.
제물과 봉헌자, 이야기의 초점은?
카인과 아벨은 주님께 제물을 바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의 지시가 없었는데 제물을 바치며 그분을 경배하니까요. 동산 밖에서도 사람은 하느님과 소통하려고 계속 애쓴다는 표시입니다. 카인과 아벨은 수확의 일부를 바칩니다. 한 해의 첫 소출을 바치는 감사 예물이었을까요?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주님께서 아벨의 제물만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무엇이 그런 결과를 낳았을까요?
많은 이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목축 문화권 출신이라 주님께서 양치기를 선호하셨다는 주장, 동물 희생 제사가 곡물 제사보다 더 우월하다는 주장, 아벨의 믿음이 더 뛰어났다는 주장(히브 11,4 참조), 제물의 질이 달랐다는 주장, 봉헌자의 마음 자세가 달랐다는 주장 등을 제시하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카인은 일반적인 땅의 소출을 바쳤지만, 양치기인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쳐 특정한 부분을 선택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물의 질이 달랐다고 추측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물론 맏배(탈출 13,2; 신명 15,19 참조)와 굳기름(레위 3,3-17 참조)을 제물로 규정한 후대의 율법도 이 주장의 근거로 제시됩니다. 또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습니다. 본디 제물은 봉헌자가 신의 마음에 들고 신과 일치하고 싶은 갈망에서 드리는 것으로, 봉헌자를 대신합니다. 따라서 제물과 봉헌자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아벨이 좀 더 특정하고 나은 제물을 드린 것은 그가 그런 제물을 받아 마땅한 분으로 주님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아벨의 마음을 주님께서 받아들이셨기에(1사무 16,7 참조), 봉헌자의 자세가 달랐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의견도 있습니다. 제물의 질적 차이나 봉헌자의 자세를 본문에서 추측할 수 있으나 그것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 사항이 본문 전체의 주된 가르침도 아닙니다. 그렇기에 본문의 침묵을 존중하여 여기에 나오는 주님의 선택을 그분의 주권에 따른 자유로, 하나의 신비로 이해하자는 의견도 제시됩니다. 요셉이나 다윗처럼 하느님께서는 종종 약자인 아우를 당신의 협력자로 자유롭게 선택하시니까요.
어느 주장이 납득할 만한가요? 카인과 아벨 이야기(4,2ㄴ-16)는 이야기(2ㄴ-5절), 대화(6-7절), 이야기(8절), 대화(9-14절), 이야기(15-16절)로 구분됩니다. 여기서 제사와 주님의 편애(?)는 이야기 전체의 도입부입니다. 주님께서 카인의 제물을 굽어보지 않으셨다 하여 그를 내치거나 관계를 끊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애끓는 부모의 심정으로 그를 염려하신다는 내용이 뒤이어 나오는 대화 부분에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옳게 행동하도록 충고하며 격려하십니다. 여기에 방점이 찍힙니다.
원인 분석보다 상황에 올바로 대처하기를
3장에서는 뱀이라는 외부 존재가 사람의 욕망을 자극했지만, 여기서는 사건을 겪고 대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죄악’이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사태의 원인을 밝히는 것도 필요하지만, 삶에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불공평을 접할 때도 흔합니다. 왜 나는 이 시대, 이 나라, 이 부모 밑에서 저 형제자매와 함께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문제의 바탕에 하느님의 어떤 선택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의 대응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맞을 수 있다고 성경의 본문은 말합니다. 상황을 초래한 원인보다 상황에 대한 사람의 반응에 주목합니다.
카인 이야기는 3장과 병행하면서 형제끼리 겪을 수밖에 없는 갈등 속에서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결정하라고 일러 줍니다. 카인은 결국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고 아벨을 죽입니다. 주님의 도움으로 태어난 한 생명이 ‘아우’(무려 일곱 번 반복)의 생명을 빼앗아 자신이 하느님이나 되는 것처럼, 생명의 주인처럼 행동합니다. 같은 주님을 섬기는 공동체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죄악이 얼마나 인간 존재에 깊이 배어들었는지 보여 줍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그의 생명을 보호해 주십니다. 표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 주신 가죽옷과 마찬가지로, 그의 죄와 벌을 상기시키며 그와 함께하는 주님의 크신 자비를 알립니다.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에제 18,32).
성경에서도 하느님의 말씀과 행동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분의 모든 신비는 성경 전체의 흐름,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하게 알 길이 열립니다. 성경을 계속 읽어야 할 이유가 좀 더 분명해지죠?
* 이용결 님은 본지 편집부장이며 말씀의 봉사자로 하느님 말씀과 씨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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