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성경의 숨은 이야기: 하느님을 손에 들고 다니는 사람 | |||
---|---|---|---|---|
이전글 | [구약] 창세기, 이게 궁금해요: 하느님께서는 왜 야곱 같은 사람을 택하시나요? |1| | |||
다음글 | [성경] 성경의 숨은 이야기: 우리의 전투 상대는 악령입니다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4 | 조회수5,091 | 추천수0 | |
[성경의 숨은 이야기] 하느님을 '손에 들고' 다니는 사람
새해, 주님의 말씀 가운데 ‘선물’ 같은 구절을 골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새해 ‘선물’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한 구절을 찾아 그분께 선물로 드리고 싶어졌습니다. 성경을 뒤적여 주님께서 마음에 쏙 들어 하실 구절을 찾았습니다. 새 아침, 당신께서 가장 기뻐하실 구절이 틀림없다 싶어 홀로 행복했습니다. 함께 외쳐 주실 테지요? “당신 계명의 길을 걷게 하소서. 제가 이것을 좋아합니다”(시편 119,35).
흔히 성경은 좋은 말씀이 기록된 책이라 합니다. 온통 옳은 말, 좋은 소리가 가득 적혀 있으며 ‘성스러운’ 하느님의 말씀이 빼곡할 것이라고 어림짐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어 보면 이 생각에 동의하기 힘듭니다. 오히려 세상 죄의 기록이며 얼룩진 인류의 흔적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이 좋은 말씀으로 꽉 찬 거룩한 책이라는 표현은 절반만 맞는 셈입니다.
성경에는 별별 망측한 상황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괴하고 끔찍한 일을 숨기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에는 사탄의 말도 섞여 있습니다. 세상을 유혹하려는 사탄의 언어는 매우 ‘반들반들’하고 그럴듯하여 얼핏 하느님 말씀으로 오해될 만큼 참되고 지혜롭게 읽힙니다. 악랄하고 끔찍한 속내를 감추고 ‘먹음직하고 소담스럽게’ 포장하는 일에 능숙한 사탄이 이미 그 ‘말’로 하와를 속여 먹었고 예수님까지 속이려 했던 걸 기억하면, 이해되실 것입니다.
욥기의 절반은 ‘어리석은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탄의 술수가 가장 잘 드러난 성경이 ‘욥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친구들의 대화가 기록된 욥기를 처음 읽으면 도통 누가 한 이야기인지 헷갈리기 일쑤입니다. 모두가 옳은 얘기고 바른 소리라 엇비슷하게 읽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기에는 함정이 많습니다. 욥의 친구들 입을 빌린 사탄은 특유의 매끄럽고 세련되며 상당히 ‘옳은 듯’하고 훨씬 ‘그럴듯’하게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더러 ‘사탄의 언어’에 밑줄을 긋고 삶의 지향으로 삼는 묘한 경우가 발생하는 이유일 터입니다.
그날 욥의 친구들은 “위안하고 위로하기로 서로 약속”(욥 2,11)하고 그곳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알아볼 수조차 없이 망가지고 추해진 욥의 모습에 아연실색하여 “목 놓아 울며, 저마다 겉옷을 찢고 먼지를 위로 날려 머리에 뿌렸”(욥 2,12)으며 “이레 동안 밤낮으로”(욥 2,13) 애통해 하였습니다. 함께 땅바닥에 앉아 지내며 “아무도 그에게 말 한마디”(욥 2,13) 건네지 못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들의 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통을 당하는 이에게는 어떤 위로의 말조차 사치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들의 꾹 다문 입술로 전해 듣습니다.
그 사랑의 침묵을 욥이 깨뜨립니다. 자신을 덮친 끔찍한 재난, 오히려 살아 있음이 형벌이었을 욥이 입을 엽니다. 그런데 ‘겨우’ 자기 생일을 저주하고 태중에서 죽지 않은 일을 한탄합니다. 원망의 화살을 하느님께 겨누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이를 악물었을지, 주먹을 불끈 쥐었을지….
욥기는 총 42장입니다. 오늘 저는 감히 욥기의 절반은 ‘어리석은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경에 담긴 얘기지만 그저 인간끼리 주고받은 주절거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서로 좋고 옳고 그럴듯한 얘기를 주고받았지만 그 ‘말’로 인해 그분께 꾸중을 들었으니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어리석음’이며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판결(욥 42,8 참조)을 내리셨으니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아픔을 가슴이 아닌 ‘머리로’ 대할 때, 마음이 아닌 ‘입으로’만 위로할 때, 상대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할 때, 상대의 마음을 보듬지 못할 때 모두 헛것이라는 주님의 결론입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위장하고 정의의 이름으로 단단히 포장을 했더라도, 그분을 속일 수 없습니다.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위로하려던 그들이 결국 사탄의 도구로 이용된 사실에 통탄하게 됩니다. 그 아리따운 생각을 지키지 못해 사탄의 것으로 전락한 일이 억울하고 속상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저지른 잘못은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쩌면 그네들은 입에 발린 위로를 넘어, 욥을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에서 ‘새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때문에 더욱 ‘정의’를 일깨워 줄 필요를 느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깨우치도록 “자네도 귀담아듣고 알아 두게나”(욥 5,27)라고 타이르며 욥을 회개시키기 위해 애썼던 것이다 싶기도 합니다. 그 심한 ‘날벼락’을 맞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욥, 요지부동이 되어 ‘죄가 없다고’ 도도하게 버티는 모습이 진심으로 안타까웠던 것이다 싶기도 합니다. 끝까지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는 고집이 너무나 딱해서 얼른 주님께 용서를 청하라고 강력히 권했던 것이다 싶기도 합니다.
진심을 몰라 주고 말끝마다 토를 달아 일일이 항변하는 욥이 점점 야속하고 얄미워졌던 것이라 살펴봅니다. 끝내 “악한 사람이 하느님에게서 받을 운명”(욥 20,29)이라고 매몰차게 몰아붙이던 마음을 이해해 봅니다. 그들이 충격요법을 쓰고 막다른 코너로 몰아간 것도 모두 ‘욥을 위한’ 일이라고 여겼던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속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말이 아니라 ‘마음’을 보시는 분이라는 진리를 잊었습니다. “나에게 올바른 것을 말하지 않았”(욥 42,7)다는 두려운 판결을 듣지 않도록 “사람들 앞에서 위선을 부리지 말고 네 입술을 조심하여라. … 네 마음이 거짓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집회 1,29-30)고 일깨우는 성경 곳곳의 외침을 듣지 않았습니다. ‘나 같으면 하느님께 호소하고 맡겨드리겠다’는 입에 발린 믿음은 애당초에 거절하신다는 따끔한 일깨움을 무시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하지 않은 사실에 있습니다. 어리석게도 자기네 생각에 묶여 자기네 뜻을 따르게 하겠다는 각오로 끝장 토론에만 열중했습니다. 자기들 관점이 지혜의 전부인 것처럼 삶의 결론을 도출하려고 왈가왈부했습니다. 세상 지식으로 설왕설래하여 고통의 근원을 밝힐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고통의 뿌리를 뽑아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오만했다는 점도 보태집니다. 끝내 그들은 처음에 가졌던 순수한 의도를 잃고 비난의 강도만 높였습니다. 욥의 기를 꺾어 주려고 모인 듯 똘똘 뭉쳐서 다치고 멍든 가슴에 소금만 뿌려 댔습니다.
그런 중에 자신을 비난하고 판단하며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친구들 틈바구니에서 “나의 권리를 박탈하신 하느님께”(욥 27,2) 탄원했던 욥의 믿음이 얼마나 탁월한지 가늠하게 됩니다. “나를 시금해 보시면 내가 순금으로 나오련마는”(욥 23,10)이라고 호소하는 믿음, 자기 마음과 믿음을 뒤집어 보여 드릴 수가 없어 애달파하는 욥의 하소연에 하느님께서 눈물을 삼켰으리라 싶습니다. “이제는 전능하신 분께서 대답하실 차례”(욥 31,35)라고 당당히 응답 달라고 청하는 믿음의 기개에 화들짝 놀라, 얼른 욥을 강복하기 위해 준비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욥이 보여 준 믿음의 확신은 고난마저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야고 1,4)으로 만드시려는 그분의 계획임을 깨달았던 지혜의 편린이라 확신합니다.
세상의 고통과 시련은 사랑의 숙제입니다
2013년 새해를 맞았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 그늘마다 숨죽여 신음하는 이웃도 여전히 있을 것입니다.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할 일이 결코 줄지 않을 것입니다. 왜 고통이 있는지, 아픔이 있는지 묻고 따지고 분석하는 어리석음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마저 시험을 당하는 일에서 빼주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어떤 고통과 시련도 우리에게는 분석되고 해석될 과제가 아니라 사랑의 숙제라는 사실을 명심하면 좋겠습니다. 욥의 친구들처럼 말만 번지르르하여 “하느님을 제 손에 들고 다니는 자”(욥 12,6)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을 코앞에 걸고 다니는 일도, 그럴듯한 믿음의 언어로 위장하는 모습도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도둑질하여 “손에 들고” 다니는 못되고 막된 행위라고 경고합니다.
새해, 우리 모두 하느님을 “손에 들고” 다니는 헛된 믿음에서 탈출하기를 기도합니다. 진심으로 그분 말씀과 그분의 뜻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영’을 돌판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는 “그리스도의 추천서”(2코린 3,3)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매일 주님을 신바람 나게 하는 선물 꾸러미를 봉헌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 장재봉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들과 10여 년 뒹굴다가 ‘새 갈릴래아’인 김해 활천 성당 주임으로 옮겼다. 평화방송 TV ‘장재봉 신부의 성경 속 재미있는 이야기’에 출연 중이다. 《윤리는 아는 것도 많네》, 《성경 속 재미있는 이야기》 외 여러 책을 썼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