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말씀과 함께 걷는다: 욥기 - 하느님의 특별 지도 | |||
---|---|---|---|---|
이전글 | [구약] 말씀과 함께 걷는다: 욥기 - 꼭대기까지 올라간 욥 | |||
다음글 | [구약] 말씀과 함께 걷는다: 시편 - 어떻게 찬양의 노래를 올려야 할까요?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4 | 조회수5,268 | 추천수0 | |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욥기] 하느님의 특별 지도
“아, 제발 누가 내 말을 들어 주었으면! 여기 내 서명이 있다. 이제는 전능하신 분께서 대답하실 차례! 나의 고소인이 쓴 고소장은 어디 있는가?”(31,35) 하느님! 자, 법으로 해결해 봅시다. 욥은 과감하게 하느님을 소환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바로 응답하시지 않고(31,40 참조) 엘리후라는 사람이 나섭니다. 엘리후는 옛 이스라엘에서 매우 흔한 이름으로 ‘그는 나의 하느님’이라는 뜻이고 바라크엘(‘하느님께서 축복하셨다’: 32,2 참조)이라는 아버지의 이름도 언급되네요. 이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화를 내었습니다(32,2 참조). 욥이 스스로 ‘하느님보다 의롭다’ 하고, 세 친구가 대답할 말도 찾지 못한 채 욥을 단죄하였기(32,3 참조) 때문이었습니다.
32,6 그리하여 부즈 사람 바라크엘의 아들 엘리후가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32-37장의 엘리후의 담론이 없다면 하느님의 응답(38,1 참조)으로 바로 이어져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엘리후의 담론은 독립적으로 편집되어 삽입되었다고 추측합니다. 이 담론은 실제로 욥과 대화한 내용이라기보다 먼저 욥의 말을 인용하며 하느님을 변호하려 합니다. 네 단락으로 구성된 엘리후의 담론은 매번 ‘엘리후가 말을 하였다’(32,6; 34,1; 35,1; 36,1 참조)로 시작됩니다. 지혜 전통에서 고통의 문제를 풀어보려는 엘리후는 자신이 ‘하느님을 대신하는 사람이고 완전한 지식을 갖추었다’(36,2-4 참조)고 합니다. 엘리후의 대담함은 다음에서 잘 드러납니다. “가련한 이를 그 고통으로 구하시고 재앙으로 그 귀를 열어 주십니다”(36,15).
엘리후는 욥이 이미 하느님께 불경의 죄를 지은 범죄인이므로 무죄를 주장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35,2-3 참조)고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욥을 원수로 여기시며(33,8-11 참조) 권리를 박탈하셨다’(34,5 참조)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을 비꼬는 것으로 여깁니다(34,7 참조). 엘리후가 말하는 ‘범죄’(33,9; 34,6.37; 35,6)는 반역이나 폭동을 저지른 ‘죄’(민수 14,18 참조)에도 사용합니다. “나는 죄가 없는데 하느님께서 내 권리를 박탈하셨네”(34,5)라고 인용된 욥의 말에서 ‘죄가 없다’는 표현은 보통 법적 시비를 가릴 때 재판관이나 하느님에게만 쓰는 ‘정의, 곧음’을 의미합니다. ‘권리(히브리어로 미쉬파트)’는 ‘법, 판단, 판결’을 의미하는데 ‘옳다, 정직하다’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미쉬파트는 욥기에서 23번이나 나옵니다. 이러한 용어의 쓰임으로 보아 욥이 법적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하느님과 겨루어 보려 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엘리후의 눈에 욥이 명백하게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감히 하느님과 겨루다니요!
엘리후의 담론은 창조주 하느님을 자연의 질서와 세계에서 바라보도록 이끕니다. 그의 담론은 주님의 발현을 은연중에 준비하는 듯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엘리후가 사용한 용어로 주님의 창조 질서를 묘사하신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엘리후도 하느님도 양쪽 다 기상 현상을 언급합니다. 예를 들면 눈(37,6; 38,22), 구름(36,29; 37,11.16; 38,34), 얼음(37,10; 38,29), 비(36,27; 37,6; 38,26.28)와 같은 공통 표현으로 하느님 중심 세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깨달을 수 없이 위대하시고 그분의 햇수는 헤아릴 수 없”(36,26)다는 엘리후의 말은 세계가 자기 중심으로 놓여 있는 욥에게 하느님 중심으로 시야를 옮기도록 땅과 시간, 빛을 창조하실 때 어디 있었느냐고 물으시는(38,4.12.19 참조) 하느님의 질문과 병행을 이룹니다. 또 엘리후의 질문(37,15-20 참조)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시는 내용과 같습니다(38,1-39,30; 40,2.8.24; 41,1-7.10-14 참조). 창조하신 세상을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권능과 전능하신 그분의 지혜는 욥을 압도하는데, 엘리후가 욥에게 하는 질문은 하느님께서 욥에게 하실 질문을 예상하게 합니다.
엘리후는 앞에서 전개된 욥기의 궁극적 질문인, 인간에게 감추어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지혜(28장 참조)에 대해 결론을 맺으려 시도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빛 속에 계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찾을 수 없고 그분은 ‘권능과 공정’(37,23)이 뛰어나고 정의가 넘쳐 사람들이 경외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를 지혜롭다는 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으십니다”(37,24). 엘리후는 욥이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여긴다는 듯, 이 마지막 말로 욥에게 일격을 가하고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38,2 지각없는 말로 내 뜻을 어둡게 하는 이자는 누구냐? 3 사내답게 네 허리를 동여매어라.
마침내 하느님께서 맹위를 떨치는 거센 바람과 같은 폭풍 속에서 말씀하십니다(38,1 참조). 폭풍은 구름, 연기와 같이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용어입니다. 이 폭풍은 욥이 귀로만 들었던 하느님의 소문을 잠재웁니다(42,5 참조). 하느님께서는 욥을 대화의 상대자로 인정하십니다. 창조된 세상에 대한 하느님 말씀(38-41장 참조)은 욥의 고통스러운 상황과 아무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새로운 눈과 열린 마음으로 자신의 처지를 보고 고통스러운 한계 상황에서 인생의 조건과 삶의 터전을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창조에 대한 장엄한 묘사는 일부분(pars pro toto)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업적을 다양하게 묘사하여 하느님을 새롭게 인식하고 참 지혜를 얻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아울러 인간 역사에 어둠의 큰 힘을 발휘하는 존재로 알려진 브헤못과 레비아탄(40장 참조)이라는 두 짐승에 대한 묘사는 알레고리적 표현입니다. 결국 이 두 짐승도 창조의 질서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존재들을 다스리는 큰 능력이 있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찬양의 노래는 여러 시편(139, 148 등)에서도 발견됩니다.
42,5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6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전통 신앙에 젖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우주를 공정하게 다스리시고 불의하지 않으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에, 욥을 참회의 길로 이끌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모순되는 현실 상황에서 기존의 신앙을 지키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하느님의 신비적 차원을 무시하고 검증 가능한 것과 보이는 것만으로 신앙을 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온갖 노력을 다 했어도 모순되는 상황과 불합리한 고통을 인간의 지혜로 이해하거나 설명하여 한 인간을 참회의 길로 들어서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욥은 하느님과 직접 대면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느님께 항변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과 독대하고 나서야 자신의 정당함을 입증하려는 필사의 노력이 참으로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특별 지도로 거둔 놀라운 성과입니다.
42,3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욥이 할 말을 잃고 침묵할 수밖에 없던 이유(40,3-5 참조)는 세상이 인간의 합리적 방식으로만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도토리가 큰 나무에 달리고 수박이 땅 위에 있는 작은 넝쿨 사이에서 달리는 것은 도무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토리가 수박같이 크다고 생각해 봅시다. 바람에 도토리가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상상이 가죠? 욥은 우주 만물을 지배하시는 하느님을 대면하고 난 뒤, 모순 속에서 지혜를 깨닫게 됩니다. 욥이 겪은 고통의 모순은 말로 설명할 수 없기에 하느님 안에서 그것을 수용해야 한다고 알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욥은 고통 중에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보게 될 코헬렛의 저자는 어떠한 대답도 책망도 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침묵으로 고통스러워합니다(L. 크렌쇼).
그러기에 시편의 저자들은 하느님께 인간의 모든 두려움과 열망, 고통과 탄식 등을 바치도록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시편을 읽으며 하느님의 지혜를 찾아보겠습니다.
* 김경랑 수녀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소속이다.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였으며, 삶의 현장인 수지 가톨릭성서모임에서 말씀을 선포하고 열매 맺으며 살아간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