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말씀과 함께 걷는다: 아모스서 -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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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4 | 조회수5,790 | 추천수0 | |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아모스서]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요즘에 많은 이가 다양한 지역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광대무변한지 아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바깥세상뿐 아니라 우리의 내면 세계 역시 넓고 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면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이들은 아주 드뭅니다.
내면 세계로 여행을 떠나려면 눈과 귀를 닫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정보로부터 차단되면 그때부터 내면 세계가 소리를 내고 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여행의 초보자들이 우선 접하는 것은 그동안 철저히 외면하고 소외시킨 자기 내면의 소리와 모습입니다. 거기에는 결코 자랑할 거리가 못되는 욕심과 계산으로 가득 찬 소리가 있고, 외로움과 소외로 인한 울부짖음, 슬픔과 분노, 불안과 절망의 소리도 있습니다.
그런 소리에 조금씩 익숙해지면 점차 어떤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고 어떤 소리는 흘려보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내면 세계의 풍광에 제법 익숙해지고 여러 소리가 점차 고요해질 때가 되면, 그동안 들어 보지 못한 소리와 보지 못한 이미지가 가끔씩 들리고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내면에 하느님에게서 오는 수신음을 잡아내는 통신망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면으로부터 하느님의 소리를 들은 아모스 예언자
아모스 예언자는 바로 내면으로부터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는 사자의 포효 같아서 아모스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목양업자요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며 걱정 없이 살던 아모스는 남쪽 유다 사람이지만 자신이 들은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자 북왕국의 성소인 베텔로 갑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사전 경고를 하지 않으신 채 심판을 내리는 분이 아니시기에(3,7 참조), 북이스라엘에 닥쳐올 심판을 예고하고자 아모스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모스는 북이스라엘 땅에서 자행되는 부정을 가차 없이 고발하면서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라고 촉구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이라면 하느님을 올바르게 예배하고, 안식일을 지키며,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동료 이스라엘인을 정당하게 대우하고 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아모스 예언자는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실상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그들 가운데 법적 정의가 어떻게 상실되었는지, 가난한 이들이 얼마나 착취당하는지, 부자들의 사치가 왜 문제가 되는지 신랄하게 고발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 행실을 고치지 않는 한 하느님의 심판이 내릴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에게도 심판이 될 ‘주님의 날’
하느님께서는 아모스 예언자를 파견하시기 전에도 이미 여러 차례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하셨습니다. 하느님은 기근과 가뭄, 마름병과 깜부깃병, 메뚜기 떼를 보내시고, 전쟁과 파괴의 경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거듭된 경고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4,6-11 참조). 그들은 아모스 예언자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모스는 그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닥치게 될 ‘주님의 날’에 대해 말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고 있던 주님의 날이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물리치실 그날, 곧 이스라엘을 위한 희망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이것을 재해석하여, 주님의 날은 이스라엘에게도 심판의 날이 되리라고 선포합니다. 그날이 오면 이스라엘이 굶주림을 체험하게 될 텐데, 그 굶주림은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데서 오는 굶주림’이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찾아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떠돌아다녀도 찾아내지 못하리라”(8,12)고 경고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다인들이 포로 수용소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던 때에 그들은 정녕 이런 굶주림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절망을 이겨 낼 수 있는 하느님 말씀을 접하고 싶어도 성경책이 없어 그럴 수 없었습니다. 성경책을 소유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유다인들은 말씀에 대한 굶주림을 채우고자 각자 기억하는 성경 구절을 담배 종이에 써서 서로 돌려 가며 읽었다고 합니다.
아모스는 주님을 찾는 것이 유일한 살 길이라고 말하며, 선을 추구하고 정의를 실천할 것을 촉구합니다(5,4.6.14-15 참조).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경신례의 형식적 준수가 아니라 이웃을 참되게 사랑하는 것, 곧 사회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번제물과 곡식 제물 대신에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5,24)고 외칩니다.
아모스가 본 다섯 가지 환시
아모스 예언자는 환시를 통해 이스라엘의 어두운 미래를 보게 됩니다. 아모스 예언서에는 그가 본 이스라엘의 멸망에 관한 다섯 가지 환시가 전해집니다. 메뚜기 떼의 공격을 받는 이스라엘의 모습, 불에 타는 도성의 모습, 다림줄과 여름 과일 한 바구니, 성전의 진동에 관한 환시는 모두 이스라엘이 어떻게 멸망할 것인가를 미리 보여 주는 환시입니다.
처음 두 가지 환시를 보았을 때 아모스는 하느님께 간절하게 기도드립니다. “주 하느님, 제발 용서하여 주십시오. 제발 멈추어 주십시오. 야곱이 어떻게 견디어 내겠습니까? 그는 참으로 보잘것없습니다”(7,2.5). 아모스의 중재로 하느님께서는 백성을 심판하려는 의지를 거두십니다. 여기에서 아모스는, 예언자란 하느님의 심판 의지를 백성에게 알려 회개할 수 있도록 이끄는 사람일뿐 아니라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임을 보여 줍니다.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아모스 예언자가 북이스라엘에서 얼마간 예언 활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모스 예언서에 따르면 그는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에 의해 쫓겨납니다.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을 하지 마라. 이곳은 임금의 성소이며 왕국의 성전이다”(7,12-13).
이 말은 심판을 경고하는 예언자들의 운명이 어떠한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과연 예언자는 환대가 아니라 반대와 박해를 받는 사람이며, 아모스 예언자의 삶도 그런 면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모스는 자신을 내쫓는 아마츠야 사제에게 이렇게 응답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7,14-15). 그는 자신의 내면을 강하게 울리는 하느님의 소리를 거역할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으랴?”(3,8) 하고 말한 것입니다.
예언자가 거듭된 박해와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힘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들은 소리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말씀은 사람을 사로잡아 그를 변모시키며,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불어넣습니다.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는 아모스를 내쫓음으로써 그를 제압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마츠야는 아모스가 선포한 하느님의 메시지를 무효화할 수 없었습니다. 아모스는 베텔에서 쫓겨났지만 베텔과 북이스라엘의 주민은 “이스라엘은 제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가리라”(7,17)는 아모스의 예언대로 아시리아 제국 곳곳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아모스가 베텔에서 활동한 지 반세기가 지나기도 전인 기원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 제국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5,24)는 아모스의 권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변에 정의의 강물이 잘 흐르고 있는지, 혹여 고여서 썩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 김영선 수녀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소속으로, 미국 보스톤 칼리지에서 구약성경을 공부하였으며 현재 가톨릭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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