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소예언서 읽기: 오 작은 고을 베들레헴(미카 5,1 참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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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4 | 조회수5,344 | 추천수0 | |
[소예언서 읽기] 오 작은 고을 베들레헴(미카 5,1 참조)
“오 작은 고을 베들레헴 너 잠들었느냐”(《가톨릭성가》 108번). 많이 들어 보셨지요? 그렇다면 미카 예언자를 알고 계신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별빛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찾아가 헤로데에게 유다인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을 때(마태 2장 참조), 율법 학자들은 바로 미카 예언서에서 그 답을 찾아냈습니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마태 2,5).
모레셋 사람 미카의 시대
미카 1,1은 “유다 임금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 시대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 시대는 이사야 예언자와 같은 기원전 8세기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외세에 시달리지 않은 시대는 거의 없지요. 그 시대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 시대의 문제는 아직도 아시리아입니다. 지금까지 읽은 아모스서와 호세아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하면서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멸망하게 될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미카는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했습니다. 그의 활동 초기에는 아시리아의 영향이 남왕국까지 크게 미치지 않았지만, 아시리아에 저항하려 하던 북왕국 이스라엘과 시리아는 유다를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려고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사야서 앞부분의 배경이 되는 상황이지요. 조금 더 늦은 시기가 되면 북왕국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멸망하고, 아시리아의 압력은 남왕국 유다까지 미치게 됩니다.
그런데 미카는 이사야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지만 어떤 면에서 차이가 납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 귀족 출신으로 보이는 반면, 미카는 “모레셋 사람”(미카 1,1)이라 일컬어지지요. 모레셋은 예루살렘에서 약 35km 떨어진 작은 마을로, 대지주들에게 시달리는 농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주변에 아제카, 소코, 라키스, 마레사 같은 요새가 있어 아시리아 군대가 주둔해 있기도 했습니다(미카 1,8-16 참조).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남왕국 유다는 아시리아에게 멸망하지 않았고 예루살렘도 끝까지 함락되지 않았습니다(이사 36-37장 참조). 예루살렘이 무사했다는 점이 신학적으로 중요하지만 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다의 거의 모든 지역은 아시리아에게 짓밟혔습니다. 이사 36,1에서도 분명하게,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유다의 모든 요새 성읍”을 점령했다고 말합니다. 점령군에게서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요?
한편으로 대지주들의 착취, 다른 한편으로 점령군의 횡포. 미카는 이러한 불의를 겪는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했습니다. 유배 전 예언자들의 예언은 모두 심판 선고가 주조를 이루지요. 미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힘없는 사람의 밭을 빼앗고 집을 차지하며 남의 재산을 유린하는 자들을 질타합니다(미카 2,1-2 참조). 그들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사랑하며 사람들의 살갗을 벗겨 내고 뼈에서 살을 발라낸다. 그들은 내 백성의 살을 먹고 그 살갗을 벗기며 그 뼈를 바순다. 내 백성을 냄비에 든 살코기처럼, 가마솥에 담긴 고기처럼 잘게 썬다”(미카 3,2-3).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들에게서 얼굴을 감추시리라고 말합니다.
“야곱에게 그 죄를 밝히고”(미카 3,8)
억압과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 힘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미카의 말을 듣기 싫어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듣기 좋은 말을 해 주는 거짓 예언자도 있었습니다. 거짓 예언자는 언제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먹을 것을 주면 평화를 외치고, 입에 아무것도 넣어 주지 않는 이들에게는 전쟁을 선포하는 이들(미카 3,5 참조). 누가 내 입에 먹을 것을 넣어 주느냐에 따라 그들의 말은 달라집니다. 정권이 달라지면 선포하는 말이 달라지고, 누가 큰돈을 주면 또 선포하는 말이 달라지고…. 언론 조작 같지요? 그것이 거짓 예언자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과 무관하게, 진리와 무관하게 누군가를 위해 말을 해주고 결국 자기 이익을 챙기는 자입니다.
미카는 그러한 거짓 예언자를 비판하면서, “나는 야곱에게 그 죄를 밝히고 이스라엘에게 그 죄악을 선포할 힘과 주님의 영으로, 공정과 능력으로 가득차 있다”(미카 3,8)고 말합니다.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에게도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이 아직 완전한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면, 천상 예루살렘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비판해야 할 것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부분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미카는 그런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힘, 주님의 영, 공정,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주님의 영’입니다. 주님의 영을 받지 않고서는 그렇게 담대하게 선포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 어떤 학생이 어려운 질문을 했습니다. “예언자들은 어떻게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하느님의 말씀인지 확신할 수 있었나요?” 정말 주님의 말씀임을 의심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선포할 수 있었을 텐데, 어디서 그런 확신을 얻었느냐는 의미입니다. 글쎄요, 생각해 보지 않은 질문이었습니다. 역으로는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그들이 지닌 확신은 그 말씀이 그들의 것이 아님을 입증할 것입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미카 5,1)
이렇게 심판을 선포하는 미카서에는 구원의 약속도 들어 있습니다.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분에 대한 말씀입니다(미카 5,1-5 참조). 이 단락의 여러 구절은 아마도 미카 예언자가 직접 한 말이 아니라 후대에 첨가된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심판을 선고한 미카 예언자의 말에 이러한 구원 약속이 첨가되어 미카 예언서라는 하나의 책이 완성됩니다.
여기서는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는 지주나 점령군 통치자, 또는 이스라엘의 불의한 통치자와 대비되는 목자가 약속됩니다. “그러나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미카 5,1).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입니다(1사무 17,12 참조). 그러나 베들레헴에서 나올 인물에 대해서는 임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라고만 말합니다. 예레 30,21에서도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임금이라는 호칭은 피합니다. 아마도 다윗 왕조가 무너진 다음,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는 호칭은 오직 하느님께 적용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장차 올 이스라엘의 통치자는 이전의 임금들과 다른 인물일 것입니다.
또 그는 목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리라고 말합니다(미카 5,3 참조). 고대 근동에서 목자는 임금을 가리키는 오래된 상징이었습니다. 목자가 양들을 맡고 있듯 임금은 한 나라의 백성을 맡는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에제 34장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다윗 왕조가 무너진 다음 이스라엘에게 목자를 주겠다고 약속하시지요.
그런데 미카서에서는 그 목자가 “평화가 되리라”(미카 5,4)고 말합니다. 장차 올 메시아가 평화를 이루리라는 것은 예언서에서 여러 차례 나타나는 주제입니다. 가장 대표적 단락이 이사 9,5인데, 그 구절에서는 우리에게 주어질 아들, 태어날 아기의 이름이 “평화의 군왕”이라고 밝힙니다. 즈카 9,9-10에서는 나귀를 타고 오는 예루살렘의 임금이 온 세상에 평화를 이루시리라고 말합니다. 미카 5,5에서는 “그가 우리를 아시리아에서 구출하시리라”고 말하지만, 이 메시아의 역할은 단순히 전쟁을 해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미카 4,3에는 이사 2장에도 들어 있는 유명한 본문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민족들을 당신 말씀으로 가르치실 때에는 모두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다시는 전쟁이 없을 것입니다. 시편 46에서도 노래하듯, 하느님께서는 활을 꺾고 창을 부러뜨리고 병거를 불에 살라 버리고 전쟁을 사라지게 하실 것입니다.
그 평화의 군왕은 예루살렘이 아닌 베들레헴이라는 ‘보잘것없는’ 고을에서 태어납니다. 전쟁에 시달린 이스라엘, 아시리아의 엄청난 군사력 앞에서 벌벌 떤 이스라엘에게 미카서는 평화를 약속합니다. 아시리아 군대가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아시리아보다 강한 힘으로 그들을 물리칠 예루살렘의 임금을 약속하시는 것이 아니라 작은 고을에서 태어나 평화를 심을 메시아를 약속하십니다. 그분 때문에 베들레헴은 우리에게도 기억됩니다. “오 작은 고을 베들레헴 너 잠들었느냐….”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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