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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소예언서 읽기: 주님은 보복하시는 분(나훔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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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5,409 추천수0

[소예언서 읽기] 주님은 보복하시는 분(나훔 1,2)

 

 

꽤 오래 전, 십여 년 전에 도서관 서가 사이를 걸어 다니다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독일어로 된 E. 쳉어의 책 《보복하시는 하느님?(Ein Gott der Rache?)》이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시편 94,1에서 취한 것이지만, 끝에 붙어 있는 물음표는 이러한 성경 구절을 읽는 독자의 당혹감을 표현해 줍니다.

 

나훔 예언서도 이 같은 문제를 제기합니다. 1,1의 머리글을 접어두고 나면 본문의 첫 구절이 “주님은 열정을 지니신 분, 보복하시는 하느님 주님은 보복하시는 분, 진노하시는 분”(1,2)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이었기에 나훔은 이런 구절로 예언을 시작할까요? 우리는 그 예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니네베

 

나훔서에는 저자에 관한 정보가 거의 들어 있지 않습니다. 1,1에서 “엘코스 사람 나훔이 본 환시의 책”이라고만 말합니다. 그나마 엘코스가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암담하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저에게 속았습니다. 1,1에서 “엘코스 사람…”이라고 하기 전에 사실은 한 줄이 더 있기 때문입니다. “니네베에 관한 신탁”이라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나훔의 시대를 알 수 있습니다. 니네베는 아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그러니 나훔은 유다가 아시리아의 영향을 받던 기원전 7세기의 예언자입니다.

 

“보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이 산을 넘어온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어디서 나온 구절인지 일부러 안 썼습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구절입니다. 이사 52,7에서는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발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제2이사야가 선포하는 그 ‘기쁜 소식’은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이사 52,9)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바오로 사도도 같은 구절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라고 말합니다. 이사야서와 로마서에서 그 ‘기쁜 소식’은 구원의 소식입니다.

 

그런데 2,1에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가 전하는 내용은 “그는 완전히 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니네베 또는 아시리아가 됩니다. 결국 이렇게 되면,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구원의 기쁜 소식에 적용하는 표현을 나훔서에서는 니네베의 함락, 아시리아의 멸망에 적용하는 것이 됩니다. 원수의 멸망을 마치 하느님의 구원같이 기뻐 환호하는 노래! 그것이 나훔서의 주제이면서 나훔서가 우리에게 제기하는 도전입니다.

 

아시리아는 엄청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7세기에 이사야서에서도 나오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한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티그리스 강가에 니네베를 건설했습니다. 아시리아는 나일 강까지, 페르시아 만부터 지중해까지 정복했습니다. 그러고는 정복한 민족들을 마구 짓밟았습니다. 나훔서에서는 그런 니네베를 가리켜 “불행하여라, 피의 성읍!”(3,1)이라고 말합니다. “온통 거짓뿐이고 노획물로 가득한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다. 채찍 소리 요란하게 굴러가는 바퀴 소리 달려오는 말 튀어 오르는 병거 돌격하는 기병 번뜩이는 칼 번쩍이는 창 수없이 살해된 자들 시체 더미 끝이 없는 주검. 사람들이 주검에 걸려 비틀거린다”(3,1-3).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니네베는 불의와 폭력 그 자체였습니다. 아시리아에 거슬러 일어난 바빌론과 이집트는 큰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바빌론은 기원전 689년, 이집트의 테베는 663년 또는 668년에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권세는 영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네가 테베보다 낫단 말이냐?”(3,8) 이 구절을 봐서 나훔서는 테베가 함락된 후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테베가 멸망을 겪었듯 니네베도 멸망하리라는 것입니다.

 

 

보복하시는 하느님(나훔 1,2)

 

“보복하시는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1,2-8의 노래에 있는 표현입니다. 니네베가 멸망하리라고 말하며 하느님을 보복하시는 분으로 기립니다.

 

보복하시는 하느님? 앞서 인용한 시편 94,1-2에서는 “보복하시는 하느님”이 “세상의 심판자”시라고 말하며 “거만한 자들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소서”라고 기원합니다. 여기서 먼저 생각할 것은 ‘보복’의 의미입니다. 이 보복은 재판의 맥락에서 불의를 꺾고 정의를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능력을 지니신 하느님을 묘사하여 1,3-5에서는 하느님께서 바다와 강들을 지배하시고, 산들이 그분 앞에서 떤다고 말합니다.

 

왜 갑자기 폭풍이며 회오리바람 이야기를 할까요? 일기예보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자연의 거센 힘을 지배하시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큰 권세도 다스리신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폭풍이 일고 회오리바람이 불어 집이 날아가고 나무가 뽑혀도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아시리아의 힘 앞에 이스라엘과 같이 약한 나라들은, 더구나 힘없이 정복당한 주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구름과 바다, 강을 지배하시는 하느님은 폭행과 억압을 저지르며 다른 나라들을 억누르는 대제국보다 더 강하시며, 역사에서 당신의 정의를 이루십니다. 하느님은 이유 없이 쉽게 분노하시고 그 분노를 무질서하게 쏟아 놓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노에 더디시고 힘이 뛰어나신 분”(1,3), “선하신 분”(1,7)이시면서도 불의를 벌하지 않고 끝까지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원수의 멸망

 

원수의 멸망을 기뻐하는 노래? 요나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니네베를 가리켜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1)고 하셨고, 어쩌면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이 우리 마음에 더 듭니다. 원수에게도 구원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 그런 하느님이 우리 하느님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훔서를 이해하려 해 봅시다. 나훔서도 성경의 예언서 가운데 하나임을 기억하면서, 이 책에서 우리에게 알려 주는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이신지 찾아봅시다.

 

첫째, 이 노래의 주제는 결국 하느님의 다스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저주 시편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불의가 세상을 덮쳐도 불신이 만연해도…”라는 성가 노랫말을 생각합니다. 피의 성읍 니네베의 길거리에 살해된 자들의 시체 더미가 끝도 없이 쌓여 있을 때, 하느님께서 계신다고,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믿는 것이 과연 쉬울까요? 하느님께서 반드시 그 불의한 니네베를 멸하시리라고 믿기가 쉬울까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니네베에게, “내가 너에게 맞서리라”(3,5)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을 거스르는 억압과 폭행이 바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주님의 주권을 거부하고 자신이 역사의 흐름을 결정할 수 있기나 한 것처럼 하느님께 맞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훔서는 바로 그런 신앙을 고백합니다.

 

둘째, 나훔서는 강대국이 부르는 승리의 노래가 아니라 팽창하는 대제국에 희생된 이들이 토로하는 믿음의 표현이라는 사실입니다. 듣는 이의 귀에 거슬리고 걸림돌이 되는 이 노래는 강자가 기록한 역사에 나오지 않는 고발을 담고 있으며, 다른 어떤 인간적 권력이 아니라 오직 “환난의 날에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분”(1,7)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둡니다.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다”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훔서는 희생자의 편에서 읽어야 합니다. 나훔서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면 혹시 내가 승리자의 관점에서, 강자의 처지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데 너무 길들여 있지 않은지 한 번쯤 반성해 볼 일입니다. 오늘도 세상 어디에선가 목소리 없는 이들이 강자들의 도성을 가리켜 “피의 성읍”(3,1)이라고 부르짖고 있을 것입니다. 나훔서는 하느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고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들 편에 계십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4년 10월호(통권 463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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