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소예언서 읽기: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스바 3,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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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4 | 조회수5,282 | 추천수0 | |
[소예언서 읽기]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스바 3,12)
스바니야 예언자가 무서운 주님의 날을 선포하여 예루살렘이 다 끝장났을까요? 아닙니다. 스바니야서는 불의와 억압을 저지르는 예루살렘에게 심판을 선고하면서도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는 가난한 이들에게서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지리라고 알립니다(3,12-13 참조). 이 구절이 스바니야서에서 가장 유명하고 많이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남은 자들, 주님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신학 때문입니다.
이 본문의 새로운 점은 가난의 긍정적 의미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유배 후에 자주 보게 될 주제이고 특히 시편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지만, 부(富)를 하느님 복의 표지로 여겨 온 전통에서는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주님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신학은 스바니야서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보고, 그 신학을 이야기할 때 항상 인용되는 것이 이 단락입니다.
이 단락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다음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에, 스바니야 예언자가 직접 쓴 것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모스와 호세아 등 유배 이전의 예언자들에게서 보았듯, 예언서에 덧붙여진 부분은 심판 선고를 더 긴 역사의 전망에서 바라보며 그 의미를 밝혀 주는 역할을 합니다.
“거만스레 흥겨워하는 자들을 치워 버리리라”(3,1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이 선고된 다음,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날에는 네가 나를 거역하며 저지른 그 모든 행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리라”(3,11). 이것은 하느님께서 해 주시는 약속입니다. 예루살렘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도록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날에” 곧 심판 후에 예루살렘이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부끄러운 죄악을 저지른 이들을 하느님께서 멸하시어 예루살렘에는 이미 그런 이들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심판받을 이들은 “거만스레 흥겨워하는 자들”(3,11)이라고 일컬어집니다. 바로 지금 권세를 누리는 이들, 하느님의 심판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이들, 히브리어 단어의 뜻으로 풀면 잘났다고 날뛰고 있는 자들, 루카 복음에서 불행하다고 일컬어지는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루카 6,24-25)을 하느님께서 “치워 버리리라”는 것입니다. 사라져야 할 것은 “교만”(3,11)입니다.
스바니야는 위로부터 구원이 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대신들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들”이고 재판관들은 배를 채울 먹이를 찾는 “저녁 이리 떼”여서 가난한 백성을 더 억압하고 착취할 뿐이고, 예언자들은 믿을 수 없는 “허풍쟁이”이며, 사제들은 거룩한 것을 더럽히는 자들이어서 하느님을 찾지 않습니다(3,3-4 참조).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기득권자들은 이스라엘을 정화하고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 계획의 도구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희망을 봅니다.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3,12)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거만한 자들을 치워버리셔도 예루살렘에는 남는 이들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3,12)입니다. 그들에게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시작됩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영적 가난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은 글자 그대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가련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형용사 ‘아니’를 영적으로 해석하려는 이들이 있지만, ‘가난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달’은 그대로 ‘빈곤’을 뜻합니다. 물론 2,3에서는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에게 주님을 찾고 의로움과 겸손함을 찾으라고 촉구하고, 그렇게 해야 주님의 분노를 피할 수 있으리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말하는 가난이 순전히 영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3,12-13에서 그들에게 약속된 것은 부유함이 아닙니다. 힘 있고 부유한 이들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때까지 억눌리던 이들이 그 부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유함은 그들을 다시 교만하게 하고 이전의 교만한 자들이 그런 것처럼 하느님을 저버리는 불의를 저지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같은 역사가 반복될 것입니다. 스바니야는 남은 자들이 “가난하고 가련한” 이들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그 가난한 이들을 묘사합니다. 먼저 하느님에 대한 가난한 이들의 태도는 “주님의 이름에 피신”(3,12)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다’는 표현은 여기에만 나타나지만, 시편에는 자주 ‘하느님께 피신한다’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피신은 위협받는 이들이 취하는 태도입니다. ‘남은 자들’에게도 위험이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위험이 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위험 앞에서 우상을 찾아가거나(1,4-5 참조) 재산에 의지하지 않고(1,18 참조) 하느님의 이름에 피신합니다.
힘 있는 사람들이 자기 능력이나 재산에 쉽게 의지하는 데 비해 실제 가난한 이들의 희망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유한 이들의 태도를 대변하는 단어가 “교만”(3,11)이라면 가난한 이들의 태도는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는 것입니다. 또 이런 까닭에 실제로 가난한 이들이 영적으로 가난하기가 더 쉽고,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습니다(마태 19,27 참조).
다음 절에서는 그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가 묘사됩니다. 그 공동체에는 불의와 거짓과 사기가 없습니다(3,13 참조). 이것은 3,1-4에서 단죄를 받은 예루살렘의 모습에 대비됩니다. ‘불의’는 무엇보다 재판에 연관됩니다. 재판관들이 사리사욕을 앞세웠다면(3,3 참조) 그들의 판결이 정의로울 수 없습니다. 또 예언자와 사제들이 거짓된 말을 하고 율법을 짓밟는다면(3,4 참조)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해석으로는 거짓과 사기도 재판과 연관 지어 거짓 증언으로 정의를 왜곡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3,13)에게는 그러한 불의와 거짓이 없습니다. 그 가난한 이들이 이전의 지배층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때 그들에게서 미래가 열립니다. 아무 위협 없이 살아가는 예루살렘은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에게서 이루어집니다.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3,14)
지금까지 심판을 선고해 온 스바니야서가 마지막에 와서는 환성을 올리며 소리치라고,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초대합니다(3,14 참조). 하느님께서도 예루살렘 때문에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고 말합니다(3,17 참조). 하느님과 예루살렘에 대해서 같은 단어들이 사용된 점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스바니야서의 마지막 장면은 “축제의 날인 양”(3,18) 기쁘게 끝납니다. 유배 이전의 예언자들이 모두 그렇듯 스바니야는 심판을, 주님의 분노의 날을 선고했지요. 그런데도 스바니야서는 미래를 말합니다. 심판을 겪으면서도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유배를 겪으면서 이스라엘이 깨닫는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유다 왕국의 멸망은 끝이 아니고,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았으며, 멸망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정화의 과정이었다는 것. 그러니 누군가는 그 과정을 견뎌 내야 합니다.
그 멸망과 혼란 가운데에서 스바니야서는 온통 어지럽게 보이는 세상의 어디에서 새로운 시작의 실마리를 찾을지 가리켜 보여 줍니다. 누가 “남은 자들”(3,13)이 되어 새 이스라엘을 시작할 것인가? 그 대답은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입니다. 하느님을 거스르는 세상이라면, 이 세상의 질서에 따라 살며 하느님의 뜻을 버려야 하는 세상이라면 하느님께 충실한 이들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유배된 후 구약성경이 가난의 긍정적 의미를 보게 된 것은, 이 세상의 부와 하느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스바니야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니 그들에게서 구원의 기쁜 소식이 온 세상에 선포되고 성취되리라고 말합니다. “거만스레 흥겨워하는 자들”이 이런 말씀을 껄끄러워할지라도 새 역사는 불의와 거짓과 사기를 저지르는 그들에게서 시작될 수 없습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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