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소예언서 읽기: 풀무치가 남긴 것은 메뚜기가 먹고(요엘 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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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4 | 조회수5,337 | 추천수0 | |
[소예언서 읽기] 풀무치가 남긴 것은 메뚜기가 먹고(요엘 1,4)
‘요엘’ 하면 ‘메뚜기’, 이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너무 심하게 들리나요? 하지만 메뚜기 재앙이 어쨌다는 것인지 알면 요엘 예언서를 아는 것입니다. 사실 열두 소예언서를 구별하고, 각각의 내용을 기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연재가 끝날 때 쪽지 시험이라도 보면 금방 드러나겠지요! 그러니까 열쇠 하나를 붙잡고 거기부터 풀어 가야 합니다.
요엘 예언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열쇠가 메뚜기입니다. 그 메뚜기는 우리에게, 앞서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주님의 날이 꼭 오고야 말리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메뚜기 재앙은 어느 시대에?
메뚜기 재앙은 어느 시대에 있었을까요? 요즘은 보통 요엘 예언서가 기원전 4세기 전반에 작성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결론이 그리 쉽게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엘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프투엘의 아들 요엘에게 내린 주님의 말씀”(1,1)이라는 한 구절밖에 없고, 메뚜기 재앙이라는 사건은 어느 시대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메뚜기 재앙 외의 역사적 사건은 요엘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엘서에서 말하는 메뚜기 재앙이 언젠가 실제 있었던 사건이라 해도, 우리는 그것이 언제 있었는지 밝혀 내지 못할 것입니다. 태풍이 그렇듯 메뚜기 재앙은 수시로 발생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요엘서의 작성 연대가 기원전 9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라는 등 아주 다양한 의견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요엘서가 열두 소예언서 가운데 두 번째 위치인 호세아서와 아모스서 사이에 자리하는 것도 요엘이 호세아나 아모스 같은 옛 예언자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한술 더 떠서, 요엘서 전체가 같은 시대에 작성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립니다. 요엘서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 메뚜기 재앙과 주님의 날입니다. 그런데 그 둘은 무슨 관계일까요?
둘의 연관을 좀 약하게 본다면, 먼저 메뚜기 재앙에 대해 말하는 본문이 있었는데 나중에 거기에 다른 저자가 종말을 이야기하는 본문을 덧붙였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보는 이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근래에 이르러서는 요엘서의 단일성을 더 강조하여, 우리의 열쇠인 메뚜기 재앙을 기술한 저자가 메뚜기 재앙을 통해 주님의 날의 위력을 표현하고 점차 보편적이며 종말론적인 전망을 열어 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책 전체의 작성 연대를 유배 이후로 잡게 됩니다. 요엘은 이전의 다른 예언자들을 인용하고, 4,1-3은 예루살렘 함락을 기정사실로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또 임금이나 궁정의 관료가 아니라 사제의 역할을 주로 언급하고 있어, 왕정이 이미 무너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듯 보입니다. 그리스인을 언급하는 4,6은 더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지만 그것은 예외적 경우입니다. 그래서 책 전체가 기원전 4세기 초쯤에 작성되었으리라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참 설명한 이유는, 메뚜기 재앙과 주님의 날을 긴밀하게 연결하여 책 전체를 해석하기 위해서입니다.
“풀무치가 남긴 것은 메뚜기가 먹고”(1,4)
요엘서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3-4장뿐 아니라 1,15과 2,1-2.10-11에도 언급되어 있는 ‘주님의 날’입니다. 1장에서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이전의 어느 시대에도 없었던 엄청난 메뚜기 재앙과 가뭄이지만, 이는 사실 주님의 날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전조의 역할을 합니다.
“풀무치가 남긴 것은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은 누리가 먹고 누리가 남긴 것은 황충이 먹어 버렸다”(1,4). 풀무치, 메뚜기, 누리, 황충이라고 번역한 단어들의 의미는 뚜렷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곤충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메뚜기의 성장 단계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반복되는 메뚜기 떼의 공격에 농작물이 남아나지 않습니다. 포도, 무화과, 석류, 야자, 사과, 밀, 보리, 기름 중에 무엇 하나 건질 것이 없습니다. 들은 황폐해지고, 땅은 통곡합니다(1,10-12 참조).
한편 2장에서는 “수가 많고 힘센 민족”의 침입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2장에 묘사된 적군의 모습은 메뚜기 떼의 모습과 겹쳐집니다. ‘라 쿠카라차’라는 노래를 기억하십니까? “병정들이 전진한다/ 이 마을 저 마을 지나….” 여기서 묘사하는 병정들은 쿠카라차, 곧 바퀴벌레이지요. 바퀴벌레를 두고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2장에서 말과 같이 달리며 병거와 같은 소리를 내고 용사처럼 달려오고 전사처럼 성벽에 오르는 것이 메뚜기일 수도 있습니다. 메뚜기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엄청난 수가 몰려오면 당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1,6에서는 메뚜기 떼에 대해 “셀 수 없이 많고 힘센 족속”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일까요? 메뚜기가 몰려드는데 예언자가 할 말은 무엇일까요? 메뚜기 떼, 가뭄, 외적의 침입과 같은 상황에서 요엘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상황만 한탄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주님의 날을 대비하라고 말합니다(2,1 참조).
아모스, 나훔, 스바니야, 오바드야 등 이미 여러 예언자가 주님의 날을 선포했기에 주님의 날에 대해서는 잘 아실 것입니다. 주님의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다른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요엘도 “주님의 날은 큰 날 너무도 무서운 날 누가 그날을 견디어 내랴?”(2,11) 하고 말합니다. 무서운 메뚜기 떼의 재앙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그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주님의 날임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요엘은 그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리라고 선포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2,12)
그렇다면 주님의 날에 대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스라엘이 유배를 체험한 후에 중시했던 주제들이 여기에서도 나옵니다.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회개입니다(2,12-17 참조).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2,13)는 유명한 구절이 여기에도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며 하느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가 전부는 아닙니다. 회개가 구원의 길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용서를 베푸는 분이 아니시라면, 아무리 울며불며 땅을 쳐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유배를 겪은 이스라엘은 자신의 공로로 자신 있게 하느님의 사랑, 선택, 특별한 관계를 요구할 수 없음을 압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탈출 34,6-7에서 선포된 하느님의 두 번째 이름입니다.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2,13). 요엘 예언서뿐 아니라 다른 예언서나 시편에서, 특히 유배 시기 후의 본문 여러 곳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멸망을 겪은 시점에서 하느님의 자비만이 이스라엘이 살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탈출기에서 첫 번째 돌 판이 깨어진 후, 곧 계약이 파기되고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단절된 후 하느님께서 온전히 당신의 주도권으로 다시 그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며 알려 주신 당신의 그 이름은, 스스로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음을 알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희망의 바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엘 예언자도, 잘못을 저지른 이스라엘에게 너그럽게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께 마음을 찢으며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이 다시 당신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도록 해 주십니다(2,18-27 참조).
전염병이 퍼지고 쓰나미가 몰려오고 전쟁이 일어나면, 그것이 천벌이라고 말하며 누군가를 죄인처럼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전염병과 쓰나미와 전쟁, 메뚜기 떼는 우리가 지금 소유하고 누리는 것이 언젠가 무너질 수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사라져 갈 것과 영원히 남을 것을 구별하게 해 주고,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아무것도 없이 하느님과 마주할 날이 있음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주님의 날’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갉아먹는 메뚜기 떼의 재앙은 우리에게 우리가 맞을 ‘주님의 날’을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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