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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소예언서 읽기: 회개할 사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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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5,711 추천수0

[소예언서 읽기] 회개할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1)

 

요나서, 참 재미있는 책입니다. 간단해 보이는 이야기인데 여러 갈래로 해석됩니다. 도서관에 가 보면 예언서들 가운데 요나서에 대한 책이 다양하게 있다는 것이 유난히 눈에 띕니다. 학생들이 요나서 줄거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수업하기에 편하지만, 다양한 해석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를 정답으로 제시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요나서에 대한 여러 해석 가운데 지난달에는 ‘이방인들의 구원’이라는 측면에서의 해석을 살펴보았습니다. 요나서는 이스라엘의 국수주의에 맞서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신다는 것을 알려 주는 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서를 또 다른 측면에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성취되지 않은 예언의 문제

 

요나서에 대해, 주로 유다교 주석가들은 요나서가 ‘성취되지 않은 예언’이라는 신학적 문제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다고 봅니다. 이러한 해석의 근거로 요나가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사명을 받았으며(1,1-2 참조), 자신의 예언이 성취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서 니네베로 가지 않으려 했다는 점 등을 제시합니다(4,2 참조).

 

이제까지, 예언자를 통해 선포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고 믿어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게 하시면서 “나는 내 말이 이루어지는지 지켜보고 있다”(예레 1,12)고 말씀하셨고, 제2 이사야서에서도 하느님은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요나서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명으로 요나는 니네베의 멸망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니네베를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요나는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거짓 예언자처럼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니네베로 가지 않으려 했던 것입니다(4,2 참조).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문제에 대해 요나서가 제시하는 대답은 이렇습니다. 하느님은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신 후에도 마음을 바꾸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유는 이미 선포된 예언자의 말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니네베의 이야기에서, 그 설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4,11) 당신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예언이 성취되어야 한다는 원칙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요나가 아닌 다른 예언자들의 경우에도,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는 것은 그저 앞으로 다가올 일을 예보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니네베가 멸망하지 않았으니 오히려 요나는 성공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러나 요나는 그 ‘성공’을, 니네베의 구원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선포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회개

 

세 번째 해석은, 요나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완고한 이들에게 니네베인들의 회개를 본보기로 제시하십니다(루카 11,32 참조). 그러나 요나서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회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요나의 회개입니다. 나훔 예언자가 “피의 성읍”(나훔 3,1)이라고 불렀던 니네베의 주민들에게 회개를 요구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반면, 요나에게 요구되는 회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분명 요나에게 마음을 돌이킬 것을 요구하십니다. 사실 요나서에서 니네베 사람들은 잠시 등장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의 초점은 요나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독자가 바라봐야 할 대상은 니네베 사람들이라기보다 요나입니다.

 

요나는, 이방인들 앞에서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신의 신앙을 공공연히 고백하지만(1,9 참조), 정작 삶에서는 하느님의 명에 순종하지 않고 그분을 피해 멀리 달아납니다. 동쪽에 있는 니네베로 가라고 하시니 서쪽 끝에 있는 타르시스로 가는 배에 오릅니다. 배 밑바닥까지 깊이 내려가, 하느님에게서 되도록 멀리 피해 숨어 있습니다. 풍랑을 만났을 때 뱃사람들은 자기 신들에게 빌지만, 요나는 기도도 하지 않고 잠만 잡니다.

 

요나가 하느님을 몰랐을까요? 이론적으로 말한다면 요나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완벽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4,2). 정확한 신학 지식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니네베에게 선포하신 재앙을 거두시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니네베로 가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장에서는 그가 하느님의 명을 피하려고 하는 이유가 딱히 나오지 않지만, 4장에서는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서둘러 타르시스로 달아났습니다”(4,2)라고 말합니다. 또 그는 자신이 하느님을 “경외”한다고 말은 했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명에 순명하지 않고 그분을 피해 멀리 달아납니다. 배를 타고 그분을 피해 멀리 도망갈 수 있기나 한 것처럼 말입니다. 머리로는 정확히 알고 있는 그 하느님을 요나는 하느님으로 모시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인 아시리아인들까지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아마도 이것이 요나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시리아의 억압을 받아 온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 아시리아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분명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요나에게 요나서는 마지막 질문을 던집니다.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4,11) 요나는 그 질문에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대답이 주어져 있지 않기에 그 질문은 우리 각자를 향합니다.

 

 

아주까리

 

여기서 저는 요나서의 작은 부분 하나에 좀 더 초점을 맞춰 보고 싶습니다. 요나가 회개하는 과정입니다. 그 열쇠는 아주까리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아주까리를 자라게 하시고, 다시 그 아주까리가 말라 죽게 하시지요. 하느님께서는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을 아까워하지도, 그들의 구원을 바라지도 않는 것을 보시고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4,10)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아주까리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하느님은 어떻게 니네베 사람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실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지요.

 

아주까리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모습에서 요나는 교훈을 얻습니다. 당신께서 만드신 피조물들을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을 보면서, 니네베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배웁니다. 지혜서에서는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께서는 만물을 다스리는 주권을 지니고 계시므로 만물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당신께서는 이렇게 하시어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지혜 12,16.19).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은 강력한 지배나 심판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주까리 하나까지 모든 것을 아끼시는 그 자애로 당신의 주권을 드러내십니다. 당신의 것이기에 무엇 하나 쉽게 버리지 않으십니다. 요나는 그런 하느님을 받아들여야 했고, 그런 하느님을 본받아야 했습니다.

 

동쪽에 있는 니네베로 가라는 주님의 말씀에 “주님을 피하여”(1,3) 배를 타고 서쪽의 타르시스로 가는 청개구리 요나의 태도는 남의 모습 같지가 않아서 언제나 가깝게 느껴집니다. 우리 마음 안에도 하느님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구석이 있는 모양입니다. 요나서에 대한 여러 갈래 해석은 모두 인간의 논리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자비로 귀결되는데, 인간 편에서 하느님을 피하고 싶은 것은 아마 하느님을 나의 틀에 맞추려고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0월호(통권 475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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