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탈출기 말씀 피정8: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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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4 | 조회수7,373 | 추천수0 | |
탈출기 말씀 피정 (8)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하느님께서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나타나 모세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하지만 모세는 소명 앞에서 주저합니다.
나는 보았고, 들었고, 알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을 직접 보았고,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었으며,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3,7 참조). 숨어 계시지 않고 백성과 항상 함께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다만, 백성의 울부짖음이 당신의 귀에 다다를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3,8 참조). 이제 그때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백성의 처지에 들어오십니다.
인간은 어려움을 겪을 때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가?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계신가?” 하고 묻습니다. 시편 10은 그런 인간의 심정을 노래합니다. “주님, 어찌하여 멀리 서 계십니까? 어찌하여 환난의 때에 숨어 계십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의 울부짖음에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뢰가 깔려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야말로 백성과 함께하면서 그들의 어려움을 보고 듣고 알고 있다고 알려 주십니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그 사실을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알려 주는 이집트 탈출과 시나이 산 계약에 관한 내용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3,12)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어 당신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라고 명하십니다(3,7-10 참조). 그분은 언제나 중재자를 통해 당신의 일을 해 가시는데, 성경에서 중재자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내세워 선뜻 소명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모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는 중재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3,11)
이런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3,12)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무슨 표징일까 궁금해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만큼 중요한 표징은 없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이는 그분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이마크 에흐예)”는 하느님께서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명을 맡기셨음을 드러냅니다(여호 1,5; 마태 28,20; 루카 1,28 참조). 예수님이 ‘임마누엘’이라고 불린 것도 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지닌 이 이름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점을 밝혀 줍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 그 자체가 바로 구원입니다.
하느님의 이름
모세는 하느님께 이름을 묻습니다(3,13 참조).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역할과 사명, 특징을 알려 줍니다. 특히 신의 이름은 신의 역할과 특성을 드러내는데, 고대 근동 문화에서 신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신의 능력과 역할을 아는 것이며, 그 신과 함께할 방법을 아는 것을 뜻합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을 물은 것도 이런 맥락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모세의 질문에 당신을 ‘있는 나‘라고 밝히십니다. 당신이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인 ‘야훼‘라고 밝히십니다(3,14-15 참조). 여기서 하느님의 이름이 두 가지인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두 표현은 동일한 뜻을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야훼’라는 말뜻을 올바로 파악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있는 나’라는 표현의 의미를 살펴보면, ‘야훼’라는 하느님의 이름이 지닌 의미를 어렴풋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 성경은 ‘있는 나’를 ‘존재하는 자(ὁ ὤν)’라고 번역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의 이름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항상 존재하시는 분’을 의미합니다. 백성이 어려울 때 숨어 계신 분이 아니라 항상 그들과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분명 ‘야훼’라는 이름에 이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외에도 학자들은 ‘있는 나’라는 표현이 ‘나다(ἐγώ εἰμι)’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전화를 걸어 ‘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부모의 목소리를 들으면, 자녀들은 금방 ‘나’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을 딱히 이름으로 사용하기에는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분명 ‘나다’라고 표현하십니다. ‘나다’라고 말씀하시면,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신명 32,39에서도 나타납니다. “바로 내가 그다.”
하느님께서는 ‘나다’가 영원히 불릴 당신의 이름이라고 밝히십니다. 어찌 보면 과거부터 계속 계셔 온 그 하느님은 결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며, 영원히 그들과 함께할 하느님임을 직접 밝히신 것입니다.
잠깐! 복음서에서도 ‘나다’라는 말이? 예수님께서도 종종 ‘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요한 18장에서 사람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를 잡으러 왔다’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나다(ἐγώ εἰμι)”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뒷걸음치면서 넘어집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느님과 같은 존재임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주저하는 모세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먼저 이스라엘 원로들을 불러놓고 당신의 계획을 알리라고 명하십니다. 그런 뒤 원로들을 데리고 파라오에게 나아가 당신의 계획을 밝히라고 명하십니다. 이어서 파라오가 어떻게 반응할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이집트를 탈출하게 될지도 미리 알려 주십니다(3,16-22 참조). 하느님의 계획을 들은 모세는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파라오가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습니다(4,1 참조). 탈출기 시작 부분에서 이집트인을 쳐 죽일 때와 너무나 달라진 나약한 모습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듣고도 불안해합니다. 이런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두 가지 표징을 주십니다. 지팡이를 뱀으로 변하게 하는 표징과 나병이 들고 낫게 하는 표징입니다.
모세는 표징을 받았지만 다시 주저합니다. 자신은 입도, 혀도 무디기 때문에 하느님의 일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려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하느님 앞에서 모세는 제발 자기 말고 다른 이를 보내 달라고 청합니다. 그때 모세가 여든 살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저하는 모세를 보고 화를 내며 말씀하십니다. “아론을 협조자로 주어 너를 대신하여 말하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맡겨진 임무, 곧 내가 계획한 일이 이루어지도록 일어나 가라”고 말입니다(4,14 참조). 그러면서 모세에게 다시금 지팡이를 손에 잡으라고 명하십니다. 제발 용기를 내라는 말씀입니다.
부족한 이들을 부르시는 하느님
모세가 하느님에게서 소명을 받는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 하느님께서는 뛰어난 인물보다 약한 이를 선택하십니다. 힘 있는 이를 뽑아 놓으면, 자신이 잘나서 모든 것이 잘되었다고 뽐낼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분은 나약한 이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해 가십니다. 그러면 당신의 영광이 더욱 크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소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은 언제나 자신이 부르심을 받을 만큼 합당한 사람인지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대부분은 고민 끝에 합당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모세의 모습을 보면서 위안을 얻습니다. 80세 늦은 나이에 사명을 받은 모세,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면서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모세. 모세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파라오 앞으로 나아갑니다. 모세의 위대함은 자신의 부족함을 넘어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그분의 일을 수행한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잠깐! 야훼? 여호와?
오늘날 히브리어는 자음만 표기합니다. 읽을 때는 모음을 붙여 읽지요. 모음 규칙은 정해져 있기에 자음만 있어도 글을 읽는 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성경이 쓰일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구약성경은 본래 자음만으로 쓰였습니다. 이런 흔적은 쿰란에서 발굴된 성경 사본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자음으로만 표기하면 YHWH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성경 사본에는 모음이 붙어 있습니다. 이 모음은 6-10세기 마소라 학자들이 성경 읽기에 도움을 줄 목적으로 고안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히브리어 성경은 예부터 내려오던 자음에 마소라 학자들이 모음을 붙여 놓은 것입니다.
마소라 학자들이 모음을 붙이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이름과 관련된 모음은 조금 독특한 양상을 띠게 됩니다. 유다인은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 성경을 읽을 때에도 주님의 이름 YHWH가 나오면, ‘주님(아도나이)’, 또는 ‘그 이름(하셈)’이라고 읽곤 했습니다. 마소라 학자들이 하느님의 이름에 모음을 붙일 때에도 해당 모음을 붙이지 않고, ‘주님(아도나이)’이라는 어휘의 모음을 붙였다고 합니다. 곧 YHWH라는 자음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붙인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마소라 학자들은 히브리어 고유의 모음 규칙을 따라 ‘아도나이’의 첫 모음인 ‘아’ 대신 ‘여’를 붙이고, 마지막 이중모음인 ‘아이’에서 ‘이’를 생략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וה ָיהְ라는 표기가 생겨난 것입니다.
וה ָיהְ를 그냥 읽으면, ‘여호와’가 됩니다. 하지만 개신교든 천주교든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원래 발음이 ‘야훼’였다고 봅니다. 하느님 이름이 ‘여’가 아니라 ‘야’로 시작된다는 점은, 곧 ‘이사-야’, ‘즈카르-야’, ‘엘리-야’라는 이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야’는 하느님 이름 YHWH의 축약형입니다.
* 염철호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학을 가르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우리 선조들이 전해 준 이야기》(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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