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탈출기 말씀 피정19: 하느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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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4 | 조회수6,283 | 추천수0 | |
탈출기 말씀 피정 (19) 하느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지난 호에서는 19장의 계약 준비 과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계약 이야기의 구조와 십계명에 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계약 이야기의 구조
19장부터 시나이 계약 장면이 길게 서술됩니다. 처음 읽으면 계약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다음과 같이 구조화하면 계약 이야기가 좀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계약 이야기(19장: 계약 준비) - 율법(십계명: 20,1-17) 계약 이야기(20,18-21: 계약 준비) - 율법(계약의 책: 20,22-23,33) 계약 이야기(24장: 계약 체결) - 율법(성소 관련 율법: 25-31장) 계약 이야기(32-34장: 계약 파기와 재계약) - 율법(성소 관련 율법: 35-40장)
첫 번째와 두 번째 계약 이야기(19장; 20,18-21)는 계약을 준비하는 대목이고, 세 번째 계약 이야기(24장)는 계약을 체결하는 대목입니다. 이 계약은 네 번째 계약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 이스라엘의 잘못으로 파기되었다가 다시 맺어집니다(32-34장). 이 계약 관련 이야기 사이에 계약 내용이 언급됩니다.
먼저 계약의 핵심 내용이 담긴 십계명이 주어지고(20,1-17), 십계명을 사회적 환경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 관련 규정이 주어집니다(20,22-23,33).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소를 어떻게 건립해야 하는지에 관한 규정이 주어집니다(25-31장; 35-40장).
계약 내용, 곧 계약 규정 가운데 성소 건립에 관한 규정은 다소 길게 다루어집니다. 이는 성소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안에 거처하신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탈출하게 된 이유와 그들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게 된 이유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에 성소 건립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이러한 계약 규정 가운데 가장 핵심 대목이라 할 십계명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십계명
“그때 하느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20,1)라고 시작되는 십계명은 계약 전체를 요약하는 하나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계명은 사람들을 옭아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느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규정, 곧 하느님뿐 아니라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한 규정입니다.
잠깐! 탈출기에 나오는 십계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십계명과 조금 다릅니다. 그리스도교의 십계명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구약성경의 십계명을 그리스도인에게 맞게 조금 변형한 것입니다.
제1계명: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도 한 분이신 하느님을 공경합니다. 따라서 유다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한 분이신 하느님 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않아야 한다는 이 계명은 대단히 중요한 계명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과 함께 길을 걸으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는 이미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이방신들은 이스라엘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신다고 느낄 때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느님을 버리게 한 크나큰 유혹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신들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장 강력히 다가온 신은 ‘바알’입니다. ‘주님’이라는 뜻을 가진 바알 신은 비와 풍요의 신이었습니다. 유목 생활을 하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 이스라엘 민족은 농경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가나안 땅에 자리 잡고 있던 바알 신앙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일부는 하느님보다 바알을 더 숭배하였고, 어떤 이들은 하느님과 바알을 동시에 섬기기도 했습니다. 제1계명은 이런 이방신을 섬기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그들과 함께 머무르시는 주님임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뜻만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들어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 신이 참 많습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가 신으로 다가옵니다. 또 자신을 신이라 주장하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이들도 생겨났습니다. 여전히 첫 번째 계명의 중요성을 절감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제2계명: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
가나안 민족은 바알 신 이외에도 다곤, 아세라 같은 다양한 신을 형상화해서 섬기곤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하느님을 형상화하여 섬기려는 욕구가 생겨 났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욕구가 분출된 것이 바로 32장의 사건입니다.
자신들에게 하느님 같은 역할을 하던 모세가 40일 동안 보이지 않자 이스라엘은 당황합니다. 그러자 아론은 눈에 보이는 하느님, 그래서 자신들을 안심시킬 하느님을 보고자 하는 백성의 욕구를 채워 주기 위해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하느님으로 섬깁니다. 이러한 죄가 북이스라엘을 세운 예로보암에게도 발견되는데, 그 역시 이스라엘 민족이 예루살렘에 주님을 섬기러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베텔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워 주님으로 공경하도록 합니다(1열왕 12,20-33 참조). 주님께서는 당신을 보고자 하는 마음에 우상을 만드는 위험을 경계하라고 명하십니다.
주 하느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이므로 어떤 형상으로도 얽매이셔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언제나 살아 움직이는 분이시며, 결코 하나의 형상 안에 가둘 수 없는 분이십니다. 물론 계약의 궤나 커룹, 성막, 구름과 불기둥 같이 주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상징물은 존재합니다. 이스라엘 민족 역시 그러한 상징물은 용인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상징물로 여기지 않고 하느님의 형상으로 여기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잠깐! 가톨릭교회의 성상은 예수님과 성인을 기억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만든 우상이 아닙니다. 교회가 성상을 만드는 관습을 가지게 된 것은 지금처럼 사진기나 영상 매체가 없던 시절에 예수님과 성인의 모습을 기억하고 사람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교육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부 신자들이 미신에 빠져 성상이 실제로 신비로운 힘을 제공하는 것처럼 여기고 숭배하다 보니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이는 매우 잘못된 행위이며 우상 숭배입니다. 그래서 10세기경 동방 교회는 성화만 인정하고 성상을 거부하여 성상을 파괴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 역시 성상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성상이 가져다주는 상징성과 교육 효과 때문에 성상을 만드는 관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제3계명: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 이름이 너무나도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에도 하느님의 이름이 나오면 하느님의 이름 대신 ‘주님(아도나이)’, 또는 ‘그 이름(하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대사제도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기 위해 1년에 단 한 번 대속죄일에 지성소에서 온 백성을 위해 그분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토록 하느님의 이름은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될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제3계명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지 말라고 권합니다. 여기서 ‘부당하게’라고 번역된 말은 ‘샤브’입니다. 이 단어는 ‘거짓된’, ‘공허한’, ‘헛된’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분의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어떤 것을 두고 부당하다고 하실까요?
레위 19,12은 하느님의 이름을 두고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하면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도 이스라엘은 “주님, 주님” 하며 그분을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죄를 짓고 그분의 계명을 어기다가 다른 민족 입에 하느님의 이름이 오르내리게 하여 그분의 이름이 더럽혀지기도 했습니다(에제 36,16-38 참조). 이 또한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행위에 해당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지 말라는 말은 단순히 하느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이가 그분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권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염철호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학을 가르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우리 선조들이 전해 준 이야기》(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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