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2: 마지막 날 예수님이 남긴 뜻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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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4 | 조회수5,400 | 추천수0 | |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 (2) 마지막 날 예수님이 남긴 뜻은
복음이 예수님에 관해 알려 주는 세 번째 보도는 그분이 세상의 죄를 속량하셨다는 것이다. 태초에 선조들은 하느님께 불순종했고, 그 후 모든 인간은 그 죄를 반복하여 짓게 되었다. 말하자면 각자가 짓는 죄는 하느님 창조의 아름다움을 항상 수포로 돌아가게 하여, 자기 마음을 혼란케 하며 정신을 흐리게 하는 어둠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당신의 것으로 짊어지고 속량하셨다.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만 속량하신 것이 아니라, 혼란스럽고 악에 물든 세상에서 매 순간 호흡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분의 삶 전체가 하나의 속량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분의 오심을 받아들였더라면, 모든 것은 구원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고 요한 복음사가는 전한다.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첫 번째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마태 16,21).
예수님의 마지막 저녁
이렇게 해서 결국 마지막 날 저녁이 찾아왔다. 그분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는 저녁이었다. 제자들과 함께 있던 그분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제자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 방 안의 분위기는 어떠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마음을 열고 이 구절을 읽는다면 당혹스러울 것이다. 제자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을 보면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제자들이 지금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는 것은 그들의 능력을 넘어선 문제였던 것 같다. 그들이 잇달아 취한 행동을 보면 그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그들은 모두 도망쳐 버렸다. 분명히 그들이 예수님을 배신해서라기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일 것이다. 그들이 비겁해서가 아니라 그 사건의 의미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도망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자.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감싸는 깊은 고독을 느끼게 된다. 그분은 홀로 계셔서 마음이 지쳤다. 제자들 가운데 앉아 계시지만, 그분은 ‘변함없이 존재하시는 하느님’으로 계신다.1) 그러므로 그분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은 그때마다 거룩한 힘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 신비스럽지만 두려움을 주는 고독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세상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분은 고독에 갇히게 된다. 하느님께 속해 있지만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것을 고집하는 세상 안에 하느님이 고립되어 계신 것이다(요한 1,11 참조).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주실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을 유다인이라면 누구나 하던 저녁식사에서 주려 하신다. 이 만찬으로 우리의 생명이 유지되고 우리는 서로에게 속하는 친밀한 공동체가 되며, 신적인 것을 만나게 된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모든 만찬은 희생 제물과 연결되어 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만찬을 당신 주권 앞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맹세로 받아들이셨고, 이 만찬으로 당신 백성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셨다. 이런 이유로 공동체는 음식을 먹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때 모든 만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 희생 제물이 특별히 부각된다. 이 제물은 파스카의 희생 제물인 ‘어린 양’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 양의 피로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희생 제물로 어린 양을 바쳤다(탈출 12,5 참조).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 신비에 당신을 투영하신다. 다시 말해 그분은 내일 죽게 되지만 당신의 죽음으로 세상의 죄를 속량할 살아 계신 분이다. 그뿐 아니라 지상에서 그분의 삶 전체가 속량이었다. 그분의 삶은 십자가상의 죽음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분의 ‘살과 피’ 곧 그분의 거룩한 생명이 바로 희생 제물이며, 그분 자신이 제자들에게 양식이었다. 이를 마태오 복음사가는 다음과 같이 보도한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6-28).
이 만찬에서 일어난 일이 얼마나 엄청난지, 그래서 혹시라도 이 사건에 대해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건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자의식에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결국 그분을 믿고 경배할 수밖에 없게 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생명의 음식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 생각하실 수 있었다면, 당신이 생명과 죽음 너머에 있다는 것을 하느님처럼 아시지 않았겠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당신을 내주신다면, 당신의 본질에는 어떤 혼란과 증오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심오하게 아실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힘 안에 살고 계시기에, 그분이 생명의 힘으로 하시는 행위는 모든 본성적 척도를 능가하는 내밀한 확실성에 이를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이것이 바로 마지막 만찬에서 이르는 맑고 투명한 의식, 더욱이 무한한 힘을 지닌 흠 없이 순수한 의식이다.
그 밤에 일어난 일은 단순히 스승이 제자들과 보내는 마지막 저녁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이처럼 순수한 의식에 이르게 하는 사건이다. 이렇게 스승은 죽음을 맞게 되지만, 죽음에서 일어나 부활하신다. 그리고 50일이 지난 뒤에는 성령께서 내려오시어 하느님의 영이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다. 그 영은 거룩한 역사를 이끌어 가며, 고독과 당혹스러움 속에서 일어난 마지막 저녁의 그 사건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신앙인을 이끌어 줄 것이다.
1) 이는 탈출 3,14에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 이름으로 계시하신 ‘야훼’ 곧 “나는 있는 나다”를 가리킨다. 예수님도 하느님의 신성을 지니셨음을 의미하는 말이다(역자 주).
* 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년) 신부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성장하고 활동한 신학자요 종교 철학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글은 그의 책 《Johanneische Botschaft》(Herder, 1966)의 일부를 김형수 신부가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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