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4: 참된 겸손이란 무엇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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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4 | 조회수5,661 | 추천수0 | |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 (4) 참된 겸손이란 무엇인가?
바오로는 요한과 달리 비범한 능력으로 필리 2,5-9을 쓰면서 ‘하느님의 마음’에 침투한다. 이 대목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말씀은 영원에서부터 아버지 곁에 계셨으며, 하느님의 모습으로, 곧 영원한 통치자와 동등한 아들로 계셨다. 그분은 존재하는 것을 ‘강도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셨다.’”
우리는 자기 소유를 잃어버릴까 봐 매 순간 두려워하는 반면, 그분께서는 우리처럼 존재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보지 않으셨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당신께 속하기 때문이다. 강도가 그분께 속한 것을 부당하게 가지려 했다면, 그분께서는 온 힘을 다해 그것을 지키려 하셨을 것이다. 한마디로 그분께서는 그것을 정당하게 가지셨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셨다.
그분께서는 이제껏 들어 본 적이 없는 일을 하셨다. 본래 지닌 주인의 신분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종의 신분을 취하고 종이 하는 봉사를 하셨다. 그러자 엄청난 변혁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리 2,9).
무엇이 진정한 겸손인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며 말씀하시려는 것은 무엇인가? 겸손이다. 이 겸손은 우리가 결코 생각지 못하는 곳에 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 있는 겸손’이다.
겸손을 말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것을 말하려면 몰이해와 저항의 벽을 통과해야 하는데, 어느 시대든 우리는 이 장벽과 부딪힌다. 니체는 이 장벽을 통과하지 못해 진정으로 저항하고 분노하며 많은 이에게 겸손에 대해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겸손에 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겸손은 빈약하여 덕을 행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이들, 불리한 자들, 노예들의 태도이다. 반면에 진정한 인간 존재는 의기양양하다. 니체에 의하면 진정한 귀족은 누구에게도 허리를 굽히지 않는 주인의 신분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이러한 가치관을 변질시키고, 삶을 빈곤함에서 규정한다고 보았다.
실제로 니체가 말한 것처럼 느끼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겸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교의 현실에서 겸손이 부당하게 왜곡되어 서술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보지 못한다면, 니체가 옳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겸손인가? 그것은 힘의 덕이다. 강한 사람만이 참으로 겸손할 수 있다. 진정 강한 사람은 강요받지 않고 자유롭게 섬기며 자기보다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이 앞에서 고개를 숙여 자유로워진다. 하지만 이러한 겸손은 결코 인간에게서 생겨나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생겨난다. 맨 처음 겸손을 보이신 분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너무 크셔서 그 어떤 힘도 그분에게 해를 입힐 수 없기에 겸손하실 수 있다. 다시 말해 위대함은 하느님의 본질이지만, 그분께서는 그 위대함을 겸손으로 격하시키실 수 있다.
하느님의 창조에서 드러나는 겸손
여기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자. 하느님께서는 언제 처음으로 겸손을 드러내셨을까? 그분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다. 흔히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 행위에서 그분의 권능과 자비를 본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인간이 파악할 수 없을 만큼 크고 풍부하며 놀랍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위대함을 언제나 드높일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유한하게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당신보다 더 작은 것을 창조하시는 일이 과연 그분에게 가치 있는지 물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확실히 어리석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어리석은 짓은 현명한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데 도움을 준다. 하느님의 창조물은 당연히 유한한 것뿐이다. 무한한 것을 창조하면 창조주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분께서는 왜 유한한 것을 창조하셨을까?
이 물음을 살펴보기 위해 인간 존재로 돌아와 보자. 우리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분께서 우리를 현실에 존재하게 하셨다는 것을 당연한 듯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고, 그래서 그분께 진정 감사드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확신한다면, 우리 ‘현존재(現存在)’(자기를 인간으로 이해하고 있는 주체로서의 존재자)는 그분께서 우리를 당신을 닮은 본래 모습으로 있게 하신 것과 다르지 않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인간의 ‘현존재’가 얼핏 ‘하느님과 이 세상’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좀 더 고심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과 세상’에서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숙고해 보면, 우리 현존재에게 하느님은 여전히 이 세상의 근거로 남아 계신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첫 번째로 창조된 존재라고 우쭐대면서도 하느님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문제’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을 현존재라고 표현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정식에 불과하다. 이렇게 본다면, 하느님이야말로 아무런 문제없이 참으로 자명하신 분이며, 오히려 인간이 문제투성이다.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모든 것’이 ‘거기’ 자기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충분히’ 존재하시기에 모든 것이 존재한다. 그분께서 존재하시기에 무엇도 ‘부족하지’ 않다. 그렇다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지배 아래에 있는 것을 왜 창조하셨을까? 그분께서 선하시기에 보잘것없는 것이 존재하도록 의도하셨다는 교의적 대답에 너무 성급하게 다다르지 말자. 자칫하면 우리가 이 대답의 의미를 편협하게 받아들여 존재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현존재를 위해 있는 것처럼 왜곡하여 이해할 수 있다.
그분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은, “거기 있어라” 하고 말씀하시어 모든 것을 당신 밖으로 내놓아 단순히 있게 하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이 창조하여 있게 한 모든 것 안에 당신의 사유, 곧 당신의 힘을 불어 넣으셨다는 점이 중요하다. 창조 작업을 완성하신 후에 당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굽어보시고 “참 좋았다”(창세 1,31) 하고 분명히 말씀하시듯, 그분께서는 유한한 것도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증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이러실 수 있을까?
* 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년) 신부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성장하고 활동한 신학자요 종교 철학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글은 그의 책 《Johanneische Botschaft》(Herder, 1966)의 일부를 김형수 신부가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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