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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6: 포도나무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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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5,831 추천수0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 (6) 포도나무의 비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포도나무의 비유는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관계를 드러내 보인다.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것을 꾸준히 심화시키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며 그 의미를 이해했다. 그리하여 그분은 제자들의 정신적 생명의 인도자로 그들 곁에 계신다. 이 해석은 분명히 옳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일까? 비유에 담긴 호소력에서 이 비유가 더 깊은 의미를 품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성경의 어떤 구절도 그 구절만으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이 위치한 전체 맥락에서 의미가 어떻게 확장되는지 봐야 한다. 요한이 첫째 서간에서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1요한 2,5)이라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명을 행한다는 뜻이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1요한 2,5)라고 말한 것은, 우리가 그분에 대해 생각하고 그분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는 의미뿐 아니라,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도 의미한다. 나아가 거기에 덧붙여 다른 것도 의미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1요한 4,12)는 개념상 지속적 신뢰나 심리적 영향을 의미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 실제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바오로도 언급한 바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2코린 5,17). 이는 하느님의 정신이 그 사람에게서 활동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일어나는 것은 어떤 생각이나 가르침, 마음뿐 아니라 실제이기도 하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이 말씀은 그분의 힘에 사로잡혀, 그 힘에 의해 실제로 새롭게 변화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이제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 저녁에 만찬을 거행하셨고, 카파르나움에서 그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그분은 만찬을 거행하시며 믿는 이들에게 음식이라는 신비한 형상으로 당신을 내어 주신다. 그분은 음식 안에 살아 계시며, 음식을 통해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신다.

 

전체적 면에서 살필 때, 인간은 밖에서부터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자기 존재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면에서부터 밖을 향해 자기 존재가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여러 종류의 내면성이 있다. 육체의 성장은 육체 기관의 내면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감정은 심리적 내면성에 따라 움직인다. 그 안에 사유하게 하는, 진리를 경험케 하는 정신적 내면성이 있고, 윤리적 결정을 단행하는 인격의 내면성도 있다.

 

나아가 바오로가 말하는 것처럼, 더 깊은 내면의 영역 곧 영적 또는 성령의 영역이 있다. 그곳이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들 안에 살아 계신 영역이다. 이 영역은 인간의 본성에서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세례와 믿음을 통해 새로운 탄생의 신비로 이 영역을 만드셨다. 그분 스스로 인간의 이 영역 안에 들어오시며, 심리학에서 말하는 것보다 더 깊이 그 사람의 내면이 되신다. 만일 신앙과 신뢰가 사라진다면 이러한 내면성도 사라지며, 그 결과 어떤 생명의 영역을 상실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 된다.

 

이러한 인간의 내면성에서 포도나무의 비유가 드러나며, 성찬의 복음이 말하는 의미가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 안에 살아계신다는 의미이다. 우선 그분은 어디에나 계시며 모든 것을 꿰뚫어 들어가시듯 내 안으로 꿰뚫고 들어오시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아가 그분은 나를 창조하셨다. 그러나 이 ‘하셨다’는 과거형은 우리가 봤을 때 그렇다. 본래 그분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여전히 창조하고 계신다. 말하자면 그분의 손길이 나를 무(無)에서 빼내어 붙들고 계신 것이다. 만일 내가 내 존재의 한계 끝에 도달한다면, 그분의 손길을 느낄 것이다. 그분은 나에게 창조적으로 부르는 호칭인 ‘너’라고 말씀하시어, 있는 그대로 ‘나’로서의 나를 인격적 존재가 되도록 붙들고 계신다. 나아가 그분은 나를 사랑하시며, 당신의 은총으로써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다. 세례와 신앙으로 그분은 내 안에 태어나셨고 나도 그분 안에 태어났다.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신비

 

비유는 이러한 내면적 신비가 개별 인간, 특히 훌륭한 신앙인에게 열려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며 통치하시는 하느님의 깊은 뜻이 모든 사람에게 침투하는 것이다. 포도나무 전체에서 가지가 자라듯, 하느님의 깊은 뜻에서 신앙인 각자의 생명이 성장한다. 바오로의 비유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신앙인을 통해 움직이시며, 그들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에 뻗어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신비에 가득 찬 단일성을 형성한다. 이는 한 몸이 지닌 단일성과 동일하다. 이 단일성에 많은 지체가 속하지만 그 지체들은 개별적이다. 거룩한 포도나무,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몸의 단일성은 교회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깊은 내면을 지배하신다. 포도나무에서 덩굴이 자라 나오고 몸에서 지체가 자라 나오듯, 교회에서 신앙인 각자가 자라게 된다.

 

믿는 이들은 그들이 받은 신비와 더욱 깊이 결합되어야 한다. 매일 바치는 주님의 기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주일에 교회에 가지만 그 외에는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이러한 깊이를 의식하고 거기에 머물러야 한다. 그 내면성은 사랑으로 보호받지 못하면 메말라 버린다. 따라서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 살아 있는 것이 메마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 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년) 신부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성장하고 활동한 신학자요 종교 철학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글은 그의 책 《Johanneische Botschaft》(Herder, 1966)의 일부를 김형수 신부가 옮긴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2월호(통권 453호), 로마노 과르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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