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약속 - 이들 중에 누가 구원받은 자입니까? (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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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4 | 조회수5,812 | 추천수0 | |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약속 - 이들 중에 누가 구원받은 자입니까? (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28-31)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미래의 자아상(自我像)을 쓰고 발표해 보자고 하셨습니다. 정확히 10년 후, 5월 5일 10시에 교정의 등나무 밑에서 만나자고 약속했습니다. 순진한 초등학생이어서 그랬는지 서로 못 알아볼까 걱정해서 그랬는지, 우리는 또 다른 약속도 했습니다. 선생님이 매일 칠판에 적어 놓던 세 가지 덕목(정직, 용기, 겸손)을 흰 종이에 써오기로 했습니다. 저는 10년 후에 그 약속을 지켰을까요?
“어떤 약속이 지키기 힘드나요?” 일상의 질문으로 시작하는 성경 나눔에서 나온 청년들의 대답은 다채로웠습니다. “의무감에서 마지못해 했던 약속이 지키기 어려웠다.” “혼자서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이 어렵다. 예로 올해 안에 결혼하겠다.”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약속.” “자신과의 약속이 제일 어렵다.” 그리고 “물리적 시간과 능력에 부치는 일은 손해가 작은 순으로 약속을 어긴다”라는 솔직한 대답도 눈길을 끕니다. 여러분은 어떤 약속을 지키기가 가장 어려웠습니까?
오늘의 주제어는 ‘약속’입니다. 약속을 지킨 맏아들과 호언장담을 하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은 둘째 아들의 비유는, 오늘 우리 안에서도 갈등을 빚습니다. 분명 오래전의 이야기인데, 성경의 말씀들은 시간과 장소를 넘어 오늘 우리의 삶에서 재해석됩니다. 오늘의 비유는 표면상 가족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주제가 신앙입니다. 누가 진정으로 ‘신의’를 다한 자인지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지녀야 할 성품과 태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질문이 그 사실을 확인해 줍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맏아들은 처음에 반항했지만 일하러 갔던 반면,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공손하게 대답하는 듯 보였지만 반대의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가 아버지를 어떻게 부르는지도 유심히 살펴볼 만합니다. 우리말 성경에 ‘아버지’라고 번역된 말은 본디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관계성을 드러내는 표현은 결국 그 스스로의 정체성을 드러내 줍니다.
케빈 페로타는 이렇게 해설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아버지의 뜻을 따른 사람은 반항한 아들이고, 이를 무시한 사람은 순종하는 척한 아들입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청자들이 깨닫기를 바라고 하신 질문입니다. …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듣고도 실천하지 않았으니, 두 번째 아들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오늘의 복음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약속은 하였지만 ‘지키지 않은’ 사람과 죄는 지었지만 ‘뉘우친’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변화’ 속에서 진정한 ‘동일성’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이야기입니다.
삶 전체가 움직이는 이야기라고 했던 철학자 폴 리쾨르는 삶을 해석하는 귀중한 요소로 두 가지, 곧 ‘성품’과 ‘약속’을 꼽습니다. 내 신체가 변하고 내가 도덕적으로 변할지 모르지만, 약속을 담은 삶의 이야기는 어제와 오늘을 연결해 준다고 설명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와 지금의 저는 분명히 많이 달라졌습니다. 키가 커졌고, 얼굴에 주름이 생겼으며, 신체의 상태가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동일하게 ‘나’입니다. 도토리가 상수리나무로 커도 그 동일성이 유지되듯이, 내 안에 불어넣으신 하느님의 숨결은 동일하고, 내적 정체성은 나를 동일한 인물로 알아보도록 해 줍니다. 변화 속에서도 동일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덕목이고 약속입니다. 달리 말하면, 시간의 변화 속에서도 신의를 끝까지 지키는 약속과 인격의 지속성입니다. 약속은 결국 ‘신의(信義)’, 신앙의 용어로 ‘믿음’과 연결됩니다.
“우리가 주님께 ‘예/ 아니요’라고 대답했다가, 나중에 마음을 바꾸도록 했던 요소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적용 질문으로 넘어가니 청년들은 일상에서 새로운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양심’ 또는 ‘마음의 소리’ 때문에 마음이 바뀌었다는 대답이 많았습니다. 어떤 청년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때입니다. 어떤 일이 있을 때, 내가 해야 할 의무도 아닌데 ‘왜 굳이’라고 생각하다가도, 측은지심이나 양심이 움직이면 좋은 마음으로 그 사람을 도와주게 됩니다.” ‘양심’에 관한 나눔은 정확히 교회의 가르침을 닮았습니다.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며 지성소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다”(〈사목헌장〉 16항). 사람이 끝내 마음을 바꾸게 된 바탕에는 하느님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는 아버지의 말씀이 자꾸 마음에 맴돌았던 맏아들은 마음을 바꾸었고, 둘째 아들에게는 들으려는 마음이 없어서 행동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의 큰 주제는 “이들 중에 누가 구원받은 자입니까?”입니다. 지난 호의 ‘착한 이웃’, 곧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구원받은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물었습니다. 두 번에 걸쳐 살펴본 주제들은 모두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를 묻습니다. 지난 호에서 죄인 무리에 속했던 한 사마리아인이 하느님의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어, 강도를 만난 사람의 ‘아픈 데를 돌보고’ 상처를 싸매 주었습니다. 이번 호에서 맏아들은 결국 마음을 고쳐먹고 회심하는 이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누가 …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라는 질문과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는 질문은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하느님께 마음을 드리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한 약속 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약속의 날은 신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저는 마지막 순간에 가지 않았습니다. 라틴어 시험을 준비하느라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직, 용기, 겸손’이라는 덕목을 써 놓고 기다렸을 4학년 때 담임 선생님, 친구들과의 ‘만남’보다 당장의 시험 점수가 급했던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오늘도 제 양심은 스스로에게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은 있는지 묻습니다. 그분의 제자가 되어 살겠다고 서품식 때 “예!”라고 약속하고 길을 걸으면서도, 수없이 되돌아보게 되는 순간마다 주님은 저에게 물으십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 최성욱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2001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미국 산타클라라 대학에서 성윤리를 전공하였으며,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윤리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역서로 리처드 M.굴라 《거룩한 삶으로의 초대: 그리스도인의 삶과 제자 됨의 영성》(201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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