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문화]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성화상을 공경하면 우상숭배인가요? - 비잔틴 제국의 성화상 파괴 논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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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4 | 조회수6,409 | 추천수0 | |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성화상을 공경하면 우상숭배인가요? 비잔틴 제국의 성화상 파괴 논쟁
가톨릭 신자들이 성모상을 보고 절하거나 동방정교회의 신자들이 이콘에 대해 특별한 신심을 보이면 개신교 신자나 이슬람교도들은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나 성인들의 생애를 조각하거나 그린 것을 공경하면 우상숭배가 아닌가?’ 현대의 종교들 사이에도 제기되는 이 질문 때문에 실제로 한 나라가 엄청난 분쟁에 휘말린 역사적 사건이 있다. 바로 ‘비잔틴 제국의 성화상(聖畵像) 파괴 논쟁’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우상숭배를 금지한 유다 율법의 영향을 받아 성상을 만드는 데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물고기나 배와 같이 간단한 상징물이나 착한 목자와 같은 소박한 그림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비를 표현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 갑자기 늘어난 신자들을 위해 좀 더 구체적인 표현이 필요했고, 이미 6-7세기경에는 교회, 수도원, 카타콤, 개인 집 등에서 성화가 그려져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신자들은 특정 성화들이 치유, 외적의 침입 방지, 이교도 개종 등 주술적인 힘을 지닌다고 믿으면서 과도하게 그것을 공경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렇게 성숙하지 못한 성화상 공경을,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강조하느라 참된 인성은 그 안으로 흡수되어 버렸다고 주장하는 ‘단성론자’들이 비판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성화상 파괴의 시작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 3세는 주로 제국의 동쪽에 있던 이단자들이나 이교도들이 성화상 공경을 반대하자 이들을 포용한다는 명분으로 성화상 파괴를 명령했다. 726년 구약성경의 우상숭배 금지를 이유로 시작된 성화상 파괴운동(iconoclasm)은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 통치 하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광적인 성화상 반대론자였던 그는 753년에 338명에 달하는 주교를 모아 히에레이아(Hiereia)에서 교회회의를 열고 주교들을 위협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성화상 공경은 우상숭배라는 결의를 이끌어냈다. 이를 근거로 성화상뿐 아니라 성인 유해 공경, 성모 마리아께 기도드리는 행위까지 모두 단죄하고 철저하게 박해했다. 많은 재속 성직자는 이에 굴복했지만, 수도자들은 대체로 격렬하게 반대하여 수많은 이들이 순교했다.
성화상 파괴에 대한 반발과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성화상에 대한 공격은 비잔틴 제국 안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성화상을 공경하던 백성은 이러한 명령을 내린 황제와 이를 따르는 주교들을 불신하고, 이에 맞서 싸우는 수도자들에게 기대었다. 황제를 반대하여 성화상에 대한 정통 교리를 발전시킨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Joannes Damascenus, 675년경-749년경)은 성화상 파괴자들을 반대하는 강력한 변론을 썼다.
이후 황제가 바뀌며 박해는 약화하였고, 자신의 어린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의 섭정을 맡은 황후 이레나는 전임자들의 성화상 파괴 정책을 중지했다. 787년에 그녀는 새로 임명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와 함께 교황 아드리아노 1세와 협상을 하여,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했다. 이 공의회는 오히려 성화상 파괴자들을 단죄하고 성모 마리아 신학과 성인 공경, 성화상 공경에 대한 교리를 확정지었다.
동서 교회가 함께한 마지막 공의회인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성화상 논쟁을 ‘흠숭’과 ‘공경’으로 구별함으로써 해결했다. 흠숭은 하느님께만 해당하고 공경은 피조물에게도 해당한다고 규정했다. 이러한 구별을 통해 성화상 공경의 교의적 기반이 마련되었지만 공의회에서는 공경을 남용하는 것도 경계했다.
그러나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도 성화상 파괴주의자들인 군부가 세운 레오 5세가 813년 황제로 즉위하자 다시 한 번 박해의 광풍이 몰아쳤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는 오래가지 못하고 황후 테오도라가 어린 아들을 대신해서 섭정하면서 막을 내렸다. 더욱이 사순절 첫 주일에 성화상을 공경하는 축제를 지내고 이후 동방교회에서 이날을 “정교회의 대축일”로 정했다.
성화상 파괴 논쟁의 영향과 평가
비잔틴 제국의 성화상 파괴 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100여 년에 걸친 논쟁은 서방교회와의 관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레오 3세의 명령에 따라 성화상 파괴 운동이 시작되자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파괴 중지를 요구하며 주교들이 결정해야 할 교의적 문제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후임자 교황 그레고리오 3세(731-741)도 로마에서 두 번의 교회 대표자 회의를 열고 성화상 파괴, 비방, 제거 행위를 단죄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레오 3세는 교황을 체포하기 위해 함대를 보내고,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등지의 교회 재산을 몰수했다. 이제 상황은 동서 제국의 극렬한 대립으로 치닫게 됐다.
한편 서방교회에서는 제2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의 사항 중 몇몇 대목이 잘못 전달되어 성화상 문제가 신학상의 문제가 되었다. 프랑크족 주교들에게는 그리스어 ‘흠숭’(λατρεία)과 ‘공경’(προσκύνησις)의 구별에 상응하는 라틴어 표현이 없었기 때문에 성화상에 대한 동방의 소위 ‘흠숭’을 부당하게 논박하였다(《카롤로 법령집(Libri Carolini)》, 790년 편집). 그러나 차츰 니케아의 결정을 받아들였으며 이 반대 논쟁은 실제로 10세기에야 끝났다.
성화상에 대한 공경을 신학적으로 확정했던 제2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은 현대인들에게도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성화상을 공경하는 것은 그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표현하는 원형 때문에 공경하는 것이고, 성경을 읽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생생한 교육적 효과를 줄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지나치거나 그 대상 자체에 매몰될 경우 우상숭배나 그릇된 신심으로 빠질 위험성이 있음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이러한 균형 잡힌 충고는 현대 교회의 신심 활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또한 성화상 파괴론자들은 성화상 공경을 우상숭배라고 폄하했지만, 몇몇 비잔틴 황제들처럼 자신의 정치적 욕심 때문에 성화상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이런 행위가 오히려 더 우상숭배에 가까울 수 있다. 우리도 자신이 만들어 낸 하느님 개념만을 고집하면서 자신의 탐욕을 위해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이용한다면, 비록 그림이나 조각을 만들지는 않아도 우상숭배의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을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 박승찬 님은 서울대학교 식품공학과와 가톨릭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 분야는 중세철학이며, 현재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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