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문화]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전 유럽에 성경을 보급한 카롤루스 대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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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4 | 조회수7,262 | 추천수0 | |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전 유럽에 성경을 보급한 카롤루스 대제
20세기 후반부터 가톨릭교회에서 성경 공부가 활성화되면서, 요즘에는 일반 신자들의 가정에도 《공동번역 성서》, 《200주년 신약성서》, 주교회의에서 펴낸 《성경》 등 다양한 종류의 성경이 있다. 성경이 이렇게 널리 보급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성경을 보급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분이 누구일까? 성경 보급에 큰 힘을 쏟은 역사적 인물이라면 아마도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 프랑스어로는 샤를마뉴, 742-814)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서방 세계의 최고 통치자 - 카롤루스 대제
카롤루스 대제는 742년경, 프랑크 왕국의 왕 피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프랑크족의 전통적인 보병대를 중무장 기병대로 탈바꿈시켜 오늘날의 서부 유럽 대부분을 손에 넣을 정도로 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 또한 경제개혁을 추진하고 무역을 부흥시키는 등 로마 멸망 이후 유럽에 등장한 가장 훌륭한 정부를 구성했다. 카롤루스 대제는 이러한 정치·문화적 업적으로 인해 서유럽인의 민족적 영웅으로 길이 기억되고 존경받고 있다.
매일 미사에 참여할 만큼 신앙심이 깊었던 카롤루스 대제는 새 정복지들도 모두 그리스도교화 되길 원했기 때문에 다소 강제적이긴 했지만 많은 이를 가톨릭으로 개종시켜 종교적 통합을 이루었다. 카롤루스 대제는 800년에 로마 교황에게서 제왕의 관을 받아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카롤루스 대제의 황제 대관은 서유럽인들에게 통일감과 목적의식을 부여하는 데 기여했다.
카롤루스 대제의 문예부흥
전쟁에 몰두하느라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한 카롤루스 대제는 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제대로 글을 읽고 쓰지 못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신화, 언어, 문화 등에 매혹된 그는 자신의 광대한 제국을 문화적으로 재건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아헨(Aachen)에 있던 그의 왕궁에 재능 있는 학자들을 모아서 고대 문학의 ‘문예부흥’을 일으켰다. 자신을 그리스도교 제국의 황제라고 여겼던 카롤루스 대제는 주교의 책무, 교구의 설립, 성당의 참사회 조직, 모든 신자의 예배 참석 장려 등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제도와 신학을 정비하고 개혁하는 일에도 힘썼다.
이 모든 계획을 실천하려면 매우 뛰어난 지성인이 필요했으나 프랑크 왕국 안에서는 적임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조력자를 찾고 있던 카롤루스 대제는 이탈리아 파르마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훌륭한 학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성경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모든 학문에 해박한 지식을 지녔을 뿐 아니라, 그리스어와 라틴어까지 능통하였다. 카롤루스 대제는 그를 본 순간 그가 프랑크 왕국의 교육을 개혁하는 데 최적임자라고 느꼈다. 그가 바로 잉글랜드 요크 출신의 학자 ‘앨퀸’(Alcuin, 735?-804)이었다. 앨퀸은 782년에 카롤루스 대제의 명으로 아헨의 궁정학교를 재건할 총책임을 맡았다. 그가 개혁한 궁정학교로 전유럽의 훌륭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프랑크 왕국은, 문맹률이 높고 우수한 교사가 부족한 것도 문제였지만 제대로 교육을 시키는 데 필요한 기반시설이 구축되어 있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앨퀸은 도서관 건립을 계획했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렴하게 책을 만들 수 있는 파피루스를 생산하던 지역은 당시 모두 이슬람 세력에 점령당해서, 서방에서 책을 만들 수 있는 재료는 양피지뿐이었기 때문이다. 앨퀸은 카롤루스 대제에게 도서관을 건립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우선 양피지를 대량으로 확보해 줄 것을 청했다. 카롤루스 대제의 명으로 프랑크 왕국 전체에서 생산된 양피지들은 아헨의 궁정학교와 투르의 필사실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을 총괄한 앨퀸은 경험 없는 새내기 필경사들을 이끌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솔선수범하여 서적의 생산과 도서관 설립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앨퀸은 카롤루스 대제가 그리스도교 정신에 입각한 제국을 만들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그의 개혁을 돕는 데 헌신했다. 교육 개혁에 필요한 회의에 참석할 때를 제외하면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어두운 필사실에서 보냈다. 추운 겨울에는 손이 얼고 동상에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앨퀸은 그리스도교 제국의 완성을 꿈꾸며 고생스러운 필사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앨퀸과 동료들이 필사한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많은 분량을 차지했던 것은 성경과 성경 주해서였다. 현재 서양 문화가 자랑하는 양피지 필사본 중 가장 오래된 사본이 카롤루스 대제의 명으로 작성된 것인데, 현존하는 최고의 사본으로 인정받고 있다.
앨퀸은 이 작업을 위해 소문자를 개발하기까지 했다. 그때까지 유럽어는 대문자로만 쓰였고, 지역에 따라 그 모양도 달랐다. 카롤루스 대제는 새롭게 개발된 소문자를 사용하도록 장려했고 그의 명에 따라 이전 책들 중 90% 정도가 이 소문자로 필사되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서유럽에 남아 있던 필사본의 숫자는 네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성경 보급과 연구의 활성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게르만족은 성경을 소중하게 여겨 금과 보석으로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카롤루스 대제의 문예부흥 시기에는 이러한 기술이 더욱 발달하여 보석이나 상아조각으로 장식된 예술품 성경이 널리 보급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앨퀸이 주도한 카롤루스 대제의 문예부흥 정책이 성경 장식에만 관심을 둔 것은 아니다.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도 이루어졌다. 앨퀸은 과거에 각광받던 수사학뿐만 아니라,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논리학과 문법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이교도 문학을 잘 이해하기 위해 개발된 라틴어 문법학을 성경 해석에 적용함으로써 이후 그리스도교 문화 발전에 초석을 마련했다. 더욱이 이렇게 발전한 문법학을 활용하여 예로니모 성인의 《불가타 성경》을 언어학적으로 고친 교정본은 9세기 이후에 널리 활용되었다.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하느님의 말씀이 사라지지 않고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데에는 카롤루스 대제와 앨퀸 같은 숨은 일꾼들이 있었다. 추운 겨울에 필사실에서 성경을 한 자, 한 자 정성껏 옮겨 쓰던 필경사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성경의 소중한 가치를 얼마나 깨닫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 박승찬 님은 서울대학교 식품공학과와 가톨릭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 분야는 중세철학이며, 현재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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