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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을 올바로 표현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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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6,236 추천수0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을 올바로 표현할 수 있는가?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노자 《도덕경》의 첫 구절은 자연의 심오한 도를 표현하는 데 인간의 언어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웅변적으로 보여 준다. 그렇다면 이 자연을 창조한 절대자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일은 과연 가능할까?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는 이 문제를 자각한 사상가들이 지속해서 나타났다. 그들은 ‘부정신학’(theologia negativa)으로 이를 극복하려 노력했다. 즉 ‘하느님은 …이다’와 같은 긍정적인 문장이 아니라, ‘하느님은 …이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을 표현하는 언어를 그대로 하느님에게 사용하다 보면, 그리스-로마 신화처럼 의인적 방식으로 신을 이해하게 되거나, 신과 피조물의 차이를 망각하는 ‘범신론’에 빠질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부정신학의 선구자들

 

그리스도교 초기에는 하느님을 물질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널리 퍼져 있었다. ‘신은 빛을 발산하는 거대한 물체’라고 생각했던 마니교도뿐만 아니라 테르툴리아누스조차 하느님을 물질적인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클레멘스는 “하느님은 일자(一者)인 동시에 일자를 넘어선 저편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하느님을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특히 오리게네스는 “하느님은 물체의 세계처럼 변화하지 않고, 연장이 없는 것으로서 공간에 얽매이지 않으며, 따라서 나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절대로 물체적인 것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하느님은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며 그것을 넘어선 초월적 존재라는 가르침은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안에 정착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자기 신학의 출발점을 부정신학에서 찾았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마니교의 신관을 배격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그는 하느님을 거대한 물체로만 여겼던 것을 개탄하면서 하느님의 다른 속성들도 ‘부정의 길’(via negativa)을 통해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은 변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시간 안에서 불변(不變)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아예 시간과 공간의 범주에 속하지 않음을 명시하는 것이다. 심지어 ‘하느님은 영원하시다’(aeternus)라는 말도 단순히 시간의 무한한 연장을 뜻하는 ‘영구함’(perpetuum)과는 구별되며 시간 자체를 벗어나 있는 분으로서 시간마저 창조하신 분임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부정의 길을 토대로 ‘생명, 진리, 선, 미, 능력, 지복, 정신’ 등의 명칭들이 지닌 의미를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피조물이 지닌 성질을 초월해서 하느님의 속성에 이르는 길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인식에 이르지 못하고 단지 상징성을 띨 뿐이라고도 생각했다.

 

 

위(僞) 디오니시우스의 신비신학

 

부정신학을 완성해 후대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친 사상가는 위(僞)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 500년경)이다. 그의 저서 《신명론(神名論)》에 따르면, 하느님께 나아가는 두 가지 길로 긍정의 길과 부정의 길이 있다. 그는 구약성경, 신플라톤주의 및 앞선 선구자들을 본받아 부정의 길을 더욱 강조했다. 하느님은 극단적으로 초월적인 존재이므로 우리는 ‘부정의 길’을 통해 모든 의인적 개념들을 제거해야 한다. 하느님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일들(예: 술에 취하는 것 등)을 부정하는 데서 시작해 피조물이 지니는 그 밖의 속성과 성질들 역시 부정해 나가야 한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본질을 전혀 인식할 수 없기에 우리가 하느님에게 사용하는 모든 명칭 - ‘선, 빛, 아름다움, 사랑, 존재, 생명, 지혜, 진리, 능력, 정의, 구원, 평화’ 등 - 은 하느님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명칭은 형용하기 어려운 그분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활동만을 나타낸다.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하여 인간은 모든 감각적 표상, 경험, 사고를 포기해야 함을 깨닫고,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통찰해야 한다. 즉, 하느님을 향해 이러한 부정의 과정을 계속해 가면 마침내 인간의 모든 언어가 전혀 적용될 수 없는 심연과 같은 ‘초본질적 암흑’에까지 이른다. 이렇게 하느님과의 신비적 일치는 인간의 완전한 무지에서 이루어진다.

 

 

부정신학의 계승자들

 

위 디오니시우스의 저서가 알려진 이후, 하느님을 ‘부정의 길’로 설명하는 것이 주류가 됐다. ‘부정의 길’에 대한 성찰은 그리스도교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스콜라 학자들은 종종 유다인 철학자 모세스 마이모니데스를 그 대표자로 인정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혼란된 자들의 박사 Doctor Perplexorum》에서 “하느님께 사용되는 모든 명칭은, 그것이 긍정적으로 사용될지라도, 하느님 안에 어떤 것을 부과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에게서 어떤 것을 제거하게 된다”고 말했다. 우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하느님께서 생명이 없는 사물들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신학’은 그리스도교 철학과 신학에 계승되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독일 신비주의(타울러, 수소)를 거쳐 스페인의 위대한 신비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까지 지속해서 영향을 미쳤다. ‘부정신학’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표현이 유한한 피조물로부터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는 하느님을 온전하게 규정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 주었다.

 

그렇지만 후대 학자들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언어의 한계를 넘어 끊임없이 하느님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 흔적 중 하나는 소위 ‘초’(Super)라는 접두어를 사용해 ‘초본질’, ‘초선성’, ‘초지혜’ 등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는 ‘탁월의 길’(via eminentiae)이다. 그러나 성경 대부분은 이런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와 같은 방식으로 하느님에 대해 기술한다. 그렇다면 인간 언어의 한계를 철저하게 인식하게 된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러한 표현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옳을까? 이에 대한 반성은 스콜라 철학의 완성자라고 불리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이용하여 발전시킨 ‘유비’(analogia) 개념에 농축되어 있다.

 

* 박승찬 님은 서울대학교 식품공학과와 가톨릭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 ·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 분야는 중세철학이며, 현재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2월호(통권 489호), 박승찬 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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