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요한 복음서 해설: 한처음에(요한 1,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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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5 | 조회수7,229 | 추천수0 | |
[요한 복음서 해설] 한처음에(요한 1,1-5)
나는 자주 묻는다. ‘성경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고 성경 말씀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것이 가능할까?’ 답은 늘 ‘그렇다’이다. 그리고 ‘그렇다’를 확신하며 기뻐한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 성경은 ‘살아 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느님 말씀이고, 창조의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성경 주석학의 발전은 놀라우나, 그 발전의 그늘에는 말씀을 학문의 대상으로 격하하는 유혹과 위험이 상존한다. 성경에 대한 신적 존엄을 인정하는 것은 학자나 문외한인 신자에게나 본질적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다. 차이는 말씀에서 오지 않고 말씀에 대한 해석에서 온다. 그 해석은 대개 지식 쌓기의 노력 정도에 따라 평가되고 결정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창조적 말씀이 지식 쌓기의 멍에에 억눌려서는 안 된다. 주석학은 말씀에 봉사하는 도구일 뿐이다. 말씀의 궁극적 목적은 생명에 있다(요한 20,31 참조). 생명은 지식의 업적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씀의 실천으로 얻어진다. 성경 말씀에 대한 견해는 학문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삶에서 행하는 실천 역시 말씀에 대한 견해의 또 다른 장이라는 말이다.
둘째, 말씀은 모든 이의 신앙에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하는 것이 그리 적절하지 않을 테지만, 성경 주석학자가 모두 신앙적이라고 평하는 것은 무모하다. 학문으로 말씀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이 신앙의 해결책으로 제시될 수는 없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세상을 신뢰하고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리라 기대하는 무모함과도 같다. 성경 주석학은 과학적 ‘확실성’에 근접하려 하지만, 신앙의 신비에는 매우 취약하다. 말씀은 신앙 안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성경 주석학은 과거의 이야기다. 과거의 해석을 현재와 미래의 신앙적 방향성으로 제시하지만, 어찌되었든 성경 주석학은 과거의 이야기에 대한 해석을 주로 담당한다. 현재 살아 있는 내가 성경 말씀에 대해 견해를 밝히는 것이 지금 살아 있는 내 신앙의 열매다. 2천 년 전 과거의 신앙고백이 성경으로 구체화되었다면, 지금 살아 있는 나는 2015년에 어떤 신앙 고백을 쏟아 낼지 고민해야 하고 말씀의 화석화를 어떻게든 막아내야 한다.
가끔 도서관에 박혀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 사회 문제와 세상 문제에 너무 서툴고 답답한 자세를 취하면서 세상의 잘잘못을 논하는 모습을 보면, 요한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육화’를 어떻게 설명할지 의문이 든다. 육화는 지금 살아가는 신앙인의 자리에서 재해석되는 것이지, 책을 통해 세상을 가르치려는 도도한 자세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요한 복음서를 읽기 전에 나는 독자들의 자리매김을 고민한다. ‘주석학 지식을 전해 줄 것인가, 아니면 말씀을 나눌 것인가?’ 답은 간단명료하다. 말씀을 나눌 것이고, 독자들을 말씀으로 초대할 것이다. 말씀은 창조적이고 살아 있으며 신앙에 연결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독자들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창조하고, 어떻게 살아 있는 대화를 나누며, 이런 작업이 어떻게 신앙으로 연결될지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한처음’으로 돌아가 보려 한다(1,1 참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말씀으로 생겨났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였고, 하느님이셨다’라고 규정된 ‘한처음’의 시간으로 돌아가 보려 한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나?
사람들 대부분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관심을 기울인다. 창조 사업을 공허한 곳에 뭔가를 가득 채워 낸 것으로 이해하곤 한다. 그래서 ‘있는 것’들의 관점에서 ‘없는 것’들을 도외시하는 해석을 ‘한처음’에 갖다 붙인다. 하지만 ‘한처음’은 하느님 외에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던 시간이다.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던 시간이고, 없는 것이 뭔지 고민한 시간이다.
없는 것은 절대적 공허함을 가리키지 않는다. 없는 것은 가능성의 시간이다. 가능성의 시간…, 여기에 나는 독자들을 초대하고 싶다. 사람은 언제나 고독하기에 사회적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 고독의 자리는 사회적 관계의 출발이자 가능성의 자리다. 뭐든 만들어 볼 수 있고, 뭐든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고독이다. ‘한처음’이 그러하다. 나 혼자 있는 시간이지만 알 수 없는, 그러나 모호하지만도 않은 다른 존재를 불러올 수 있는 시간이 ‘한처음’이다. 혼자이나 함께하기를 원하는 시간, 함께하는 것이 혼자의 시간이 존재하는 이유가 되는 것, 이것이 ‘한처음’이 가진 의미다.
말씀은 그 ‘한처음’에 참으로 어울리게 묘사된다. 1,1의 말씀을 곱씹어 보자.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그리고 말씀은 하느님 자체였다. 바로 자신이면서 ‘함께’ 있는 존재가 가능하다는 점이 신비롭다. 함께 있음이 바로 자신이 존재하는 것, 이것이 말씀의 존재 방식이다.
모든 것은 하나에서 출발했고, 그 하나는 ‘함께’여야 하는 존재 방식을 고수한다. 다른 것들이 만나 여럿이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의 존재로 이어지고 완성된다. 그래서 빛이 어둠과 구분되어 떨어져 있지 않고, 어둠이 빛을 밀어내지 않는 조화 자체가 모든 것이고 하나다.
‘한처음’ 세상이 만들어졌을 때, 모든 것이 가능성으로 설 을 때 어떤 것도 소외되거나 예외일 수 없고, 어떤 것도 함께하지 못할 이유가 없고, 어떤 것도 나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제 종류대로”(창세 1,21),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며 서로를 하나로 엮어 내는 데 몰두했다.
1세기 말엽 요한 복음서가 쓰일 때, 세상은 두 편으로 나눠 생각하는 데 익숙했고, 하느님마저 ‘착한 신’, ‘나쁜 신’으로 갈라놓으려 했다. ‘한처음’의 시간을 망각한 채 하느님의 조화를 깨뜨린 것이다.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늘 우리 주변에 맴도는 악함이다. ‘한처음’으로 돌아가는 지혜를 캐는 데 함께하실 분, 여기에 모이시라.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사제품을 받은 후 2009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과 대중 강연,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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