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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 복음서 해설: 사랑하면 될 터인데…(5,3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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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6,724 추천수0

[요한 복음서 해설] 사랑하면 될 터인데…(5,31-47)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전환한다는 방침에 정치권은 물론이고 학계와 시민 사회가 시끄럽다. 시끄럽기에 많은 이가 관심을 보이고 저마다의 의견을 ‘올바르다’ 외친다. 이건 아닌데,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이런 현상 역시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어렵사리 받아들인다. 인간은 과거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힌 현재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핏기 어린 아우성으로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일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역사’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히스토르(ιστωρ)’에서 왔다. 뜻은 ‘판단하다, 조사하다’ 정도로 요약된다. 역사는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해석 주체들이 내놓는 다양한 의견의 조합 또는 대립을 통해 성장하거나 퇴보한다. 그게 역사다. 우린 지금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 가는 중이며, 그 책임은 전적으로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 시대에 함께 살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역사의 해석을 부추겼다. 알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하느님이 세상 한가운데서 예수님의 말씀과 일로 드러나고 있다(5,36). 이 역사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해석 주체의 범주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유다인으로 대표되는 대립적 부류(5,42)와 세례자 요한을 필두로 모세와 성경까지 언급되어 예수님을 증언하는 부류다(5,46). 오늘 우리가 읽는 요한 복음서의 한 단락은 해석 주체의 대립 속에 예수님의 말씀과 몸짓 그 너머로 우리를 초대한다.

 

예수님의 등장은 아버지를 드러내는 데 필요했다. 예수님의 말씀과 몸을 통해 하느님은 세상에 보란 듯 활보하신다(5,39). 아버지와 예수님은 다른 분이 아니다. 같은 분으로서 서로의 다름에 대해 증언하신다(5,32). ‘다르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형용사는 두 가지다. ‘알로스(ἀλλοϛ)’는 같은 종으로서 다름을 가리킬 때 사용되고, ‘헤테로스(ἕτεροϛ)’는 서로 다른 종의 차이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예수님이 증언할 다른 분을 가리킬 때 요한 복음서는 ‘알로스’를 사용한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당신을 증언할 다른 이가 있다고 하는 말도 실은 당신이 같은 하느님으로 이 세상에서 말하고 있다는 뜻이다.

 

같은 분이 다른 분을 통해 굳이 증언해야 할 이유는 유다 전통에서 기인한다. 유다 전통은 스스로 증언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적어도 둘이나 셋의 증언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보장받아야 한다(민수 35,30; 신명 19,15 참조). 예수님이 들려준 이야기와 보여 준 행동은 하느님에 대한 증거였고, 그것은 또한 하느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증언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요컨대,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통해 정당성을 가지게 되고 하느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통해 진실로 확증된다. 예수님의 증언은 전적으로 하나 됨 안에서 하는 증언이었고, 그 하나 됨을 위해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으로서 증언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율법을 통해, 또 예언자들을 통해 줄기차게 하나를 이야기해 오셨다. 그 하나는 요한 복음서에서 한 문장으로 쉽게 정리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3,16). 하느님은 태초부터 하느님으로 사랑하셨고, 예수님을 통해 인간으로 그 사랑을 완성시키셨다. 하느님과 그 아들 예수님의 완전한 일치를 통해 사랑은 연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연속적이어서 한결같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보여 주려는 하느님의 사랑에 등을 돌리고 여전히 어둠에 머무르고 있다. 하느님 아버지의 목소리와 모습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예수님을 통해 들려오고 보이는 데도 유다인들은 두 눈 꼭 감고 두 귀를 닫아버린 채, 하느님에 대한 무지를 자기들끼리의 앎으로 드러낸다. 이유인즉, 이렇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5,44) 마음이 없다는 얘기다. 유다인들의 역사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는 지난하면서도 굳건했고, 그리하여 충분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마음은 하느님을 통해 자신들만의 자리를 지키고 유지하려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은 당신을 만날 자리를 마련하셨지만 유다인들의 자리는 하느님의 자리에 조응하지 못했다. 마음이 떠난 자리엔 여전히 예수님의 증언만이 외로이 머무른다.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5,38).

 

유다인들은 성경을 통해 ‘간접적’으로 하느님을 만났다. 성경이라는 ‘책’을 통해 모종의 특별 계급을 형성한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간접적인 것’을 ‘절대화’하는 데 이른다. 실제 삶을 ‘직접’ 살아 현실의 팍팍함에 지쳐 있는 민초의 처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죄스러운 것이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 ‘직접적인 삶’에 살이 되어 오셨다.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은 하느님 안에 계시어, 한 분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만의 방법이 ‘메노(μένω)’라는 동사에 녹아 있다(5,38). ‘메노’는 인격적 관계의 내적 일치를 가리키는 말로 지속적인 인내와 봉사로 다른 존재와 ‘함께 머무르는 것’을 가리킨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믿는 이들의 내적 일치를 위해 ‘메노’가 사용된다(10,38; 14,10; 14,20; 15,7). 인격의 내적 일치는 적당한 공부와 지식의 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격에 대한 이해와 인격체 간의 만남이 직접 이루어져야 하고 살 내음이 나야 가능한 일이다. 인격은 직접적 삶의 체험, 곧 함께 머무르는 일로 다듬어지고 가꾸어진다.

 

요한 복음서가 말하는 ‘유다인들’은 성경을 통해 하느님과 민초가 ‘함께 머무르는 것’을 방해했다. 실제 삶보다 책이라는 간접적인 삶에 익숙했던 그들은 성경에 대한 앎을 현실을 단죄하는 ‘엄격함의 무기’로 사용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연설을 통해 교황 요한 23세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시대의 잘못에 대해 매우 엄격하게 단죄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의 신부는 엄격함의 무기로 협박하기보다 자비의 치유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면 될 터인데, 그게 어렵다. 하느님을 만난다는 건, 그분을 증언하러 왔던 수많은 신앙 선조의 말과 삶을 통해서도 가능한 일이 아닌가. 마음이 움직여야 사랑이 가능하다. 이런저런 지식의 총체 안에 난해한 개념들을 무기 삼아 하느님에 대한 개념을 정리한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일까. 성경을 공부하지 말고 성경대로 살아야 된다는 명제 앞에 우리는 얼마나 떳떳할까. 행여 공부한 것에 기대어 하느님에 대한 ‘가장 난잡한 무지’를 드러내는 건 아닐까. 등이 구부러진 채 성당 안에 앉아 홀로 외로이 묵주를 굴리는 할머니의 뒷모습에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과 진리와 생명을 발견하길 바란다. 문자 속에서보다 때론 삶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우리 모습 속에 예수님이 살아 계시고 함께 머무시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사제품을 받은 후 2009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과 대중 강연,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2월호(통권 477호), 박병규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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