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요한 복음서 해설: 사랑만이…(8,1-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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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5 | 조회수6,730 | 추천수0 | |
[요한 복음서 해설] 사랑만이…(8,1-11)
강남역 사건을 두고 여혐(女嫌, 여성 혐오) 사건이라고 말들 한다. 한국 사회에서 여혐 사건은 오래되었고 현재 진행 중이다. 강남역 사건은 우발적이고 요사스런 사건이 아니라 질리도록 계속된 한국 남성의 졸렬함이 드러난 사건이다.
요한 복음을 읽다가 뜬금없이 강남역 사건을 언급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하느님께서 살덩이가 되어 이 세상에 오셨고, 이 세상 곳곳에 스며 있는 그분의 살 내음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한 세상이 혐오스러운 세상, 갈라진 세상으로 결판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강남역 사건에서 죽어간 ‘여자’는 ‘남자’의 혐오 대상이 아니라 사랑받아야 할 ‘인간’이었다. 여혐은 인간에 대한 거부였고, 인간을 사랑한 하느님에 대한 저항이었다. 동시에 강남역 사건은 여혐 사건이 아니라고 우기는 남자들의 호들갑 역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조차 포기한 수컷의 굉음에 불과하다. 죽어간 자가 ‘여자’라서, 힘없어서, 남자보다 못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서 남자와 똑같은 ‘인간’이라서 우리는 강남역 사건을 깊이 고민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인간을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말이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남성의 폭력적 행태에 긴장하며 불편해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여인과 함께했던 남자는 어디에 있을까, 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여인만 끌고 왔을까, 여인의 두려움은 얼마나 깊고 어두울까….
여인이 끌려온 자리는 성전이었다. 예수님은 가르치고 계셨고 온 백성은 그분 곁에 함께 했다. 요컨대, 여인이 붙들려 온 곳은 거룩하디거룩한 성전이며 하느님의 가르침이 있는 곳이었다. 거룩함과 더러움(유다 사회가 여인을 더럽게 여겼고, 그렇게 믿었으며, 그래서 죽이려 했다!)이 예수님을 두고 교차한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 그들은 이미 답을 가지고 있었다. 간음한 여인은 죄인이라는 답, 그래서 죽여야 한다는 답. 그 답은 선명했고 선명했기에 다른 물음을 허용치 않는다(신명 22,23-24 참조). 그럼에도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묻는다. ‘이 여인을 어찌할까요…?’ 예수님께 주어진 ‘시험’에 대한 답은 두 가지로 기대될 터였다. 율법을 따를 경우 예수님의 세상에 대한 사랑, 그 누구도 심판하지 않겠다는 그 사랑은 무너질 것이다(3,17 참조). 그렇다고 사랑을 강조할 때, 율법을 파괴했다는 비난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신명 22,22; 레위 20,10 참조). 둘 중 하나의 답을 기대하며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집요하게 예수님께 묻는다(8,7). 어느 답이라도 예수님은 비난받을 것이고, 그리하여 그들에게 예수님은 여인과 함께 제거 대상이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예수님은 침묵하신다. 그 침묵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가 제시한 두 가지 답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땅에 무언가를 쓰고 계신 예수님은 여인에게 집중된 판단을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에게로 옮겨 놓으신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8,7). 여인이 죄인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들이 죄가 없어야 하고, 여인이 죄인임을 그들이 목격해야 한다(신명 17,5-7 참조). 요컨대, 율법으로 단죄하는 자는 스스로 율법에 떳떳해야 했다. 복음 이야기를 무턱대고 따라가다가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처럼 된다. 이 여인을 어떻게 처리할까, 용서할까 말까… 라는 식으로 우리의 해석은 진행되고, 용서하는 분으로 예수님을 치켜세우기에 급급해진다. 이런 해석의 이면에는 여전히, 여인은 죄인이고 죽어야 한다는 서슬 퍼런 단죄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예수님은 이런 해석을 거부하신다. 여인의 자리에 ‘그들’, 그들의 자리에 ‘죄 많은 우리’를 또한 끼워 넣으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편중된 단죄, 특정 계급에 대한 심판을 거부하신다. 그분은 여인을 ‘우리 모두’를 되돌아보게 하는 기회로 제시한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떠나간 것은 단죄의 주체에서 단죄의 대상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았기 때문이고, 단죄가 사라진 자리엔 ‘간음한’ 여인이 아니라, 그냥 ‘여인’이 홀로 남는다(예수님은 여인을 ‘여인’이라고 부르신다. 간음한 여인이 아니다!). 이 여인을 이제 어떻게 대할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8,11). 예수님은 분명 심판하지 않는다 하셨다. 세상을 끝까지 사랑할 것이라고도 하셨다(15,9 참조).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단죄에서 용서, 그리고 사랑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읽어 내는 건 어렵지 않다. 진짜 어려운 것은, 단죄를 포기하고 떠나가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보다 더 잔혹하고 더 완고하게, 이웃을 마구 단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모든 행동은 그것이 사랑일지라도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일까.
강남역 사건을 한 정신병자의 일탈로 볼 수 있고, 그래서 여혐이니, 남성 우월주의니, 성적 차별이니 하는 사회 일각의 목소리를 덮어 둘 수는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사건이 가지는 사회적 반응에 주목할 필요를 느낀다.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언가 쓰면서 여자를 물어뜯던 당시 사회의 폭력성을 직시하셨듯, 나는 강남역 사건을 내 의식의 한켠에 되새기며 오늘 한국 사회 안에 군림하는 남성의 폭력성을 직시한다. 한국에서 남자로 산다는 건, 일정 부분 기득권을 누리는 것이고 여혐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사회적 반성을 직시한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상대, 그 남자가 ‘나’일 수 있다는 사실을 또한 직시하면서….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된 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성서신학).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가르치면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과 대중 강연,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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