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요한 복음서 해설: 하나의 믿음(8,31-5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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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5 | 조회수6,697 | 추천수0 | |
[요한 복음서 해설] 하나의 믿음(8,31-59)
아브라함을 두고 예수님과 유다인들이 논쟁을 벌이는 대목은 우스울 정도로 유치하다. 성경 말씀을 두고 유치하다 말하는 것이 불경스러운가.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유다인들의 논리라는 사실을 깨닫길 바란다. 도발적인 글투에 독자들은 당황스럽거나 불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글은 조금 강하게 쓰고자 한다. 왜냐하면, 필자는 오늘 함께 읽을 복음에 등장하는 유다인들에게 화가 나 있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이’였다(8,31). 그러나 이 믿음은 아브라함의 권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작동한다. 지금껏 우리가 읽어 온 요한 복음의 내용은 일관되게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요컨대, 예수님은 생명의 빵으로 이 세상에 온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하는 것이 요한 복음이다. 유다인들은 이 사실을 두고 갈등을 일으켰는데(7,40-44 참조),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실은 지난 역사 속에서 자신들이 지켜 온 의식 체계의 혼란 때문이었다. 예수님을 두고 사유하고 그의 정체성에 접근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지켜 온 것에 대한 집착이 예수님을 갈등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유다인들의 의식 체계는 ‘하나’로 요약된다. 하느님은 한 분이셔야 하고, 그 하느님을 따르는 길은 자신들이 과거부터 켜켜이 쌓아 온 율법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다(8,41).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긴 것은 유다인들의 오래된 습관이었고(신명 32,6; 이사 1,2; 63,16; 64,8 참조), 관습은 국수주의적 폐쇄성을 부추겼으며, 율법을 통해 다른 민족과의 차별을 철저하게 공고히 했다(신명 6,1-3.17.24-25 참조).
‘한 분의 아버지’라는 인격체는 율법이라는 제도와 규칙을 통해 ‘하나’라는 화석이 되어 갔다. 아브라함은 이런 유다인들의 입장을 견지해 주는 보증수표였다. 신앙의 길에 두말없이 순순히 따라나섰던 아브라함은, ‘하나’이신 하느님께 선택된 ‘하나’의 백성으로 떳떳하다는 유다인들의 자존감을 위한 제물로 손색이 없었다.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을 통해 하느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모습을 치장하는 데 바빴고, 아브라함의 권위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급급했다. 하느님이 누구든, 아브라함이 누구든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그 뒤편에선 열심히 율법을 재생산하며 그들의 현실적 계급진영을 더욱 견고히 했다. 유다인들에게 ‘하나’는 자신들의 이름만 드높이는 바벨 탑이었다.
여기엔 하나의 위험이 도사린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다른 제도나 규칙, 존엄한 권위 등에 기댈 때에는 자신을 잃어갈 위험이 상존한다. 말하자면 사랑해서 결혼한다면서 혼수로 열쇠 몇 개는 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제시하는 구태와 닮은 셈이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유다인들 앞에 서 있다. 그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으로 스스로를 계시한다. 어디에도 기대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예수님의 모습 하나로 유다인들과 대화한다. 유다인들은 그 대화 속에 참 많은 것을 쑤셔 넣는다. 아브라함은 물론이거니와 예수님의 출신 성분까지 들먹인다(8,48). 그들은 지금 하느님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의식 체계가 파탄되어 가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잃어가는 셈이다.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죄를 지어 종노릇하고 있다고 말한다(8,34). 죄는 단순히 윤리 도덕적 책임을 불러오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다. 죄의 근본은 ‘더 먹음직스럽고, 더 유식해질 것 같으며, 더 멋져 보일 것 같은’ 것에 대한 개인의 폐쇄적 욕망에서 시작한다(창세 3,6 참조). 욕망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용인하지 않는다. 현실을 자기 편한 대로 조작하고 편집하게 한다. 오늘 복음의 유다인들이 그렇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8,33). 감히 하나밖에 없는 하느님의 백성이 종노릇했다고 말하다니! 유다인들은 예수님에게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허나 역사는 말한다. 유다인들은 바빌론에, 페르시아에, 그리스에, 그리고 로마 제국에 철저히 종노릇해 왔다고. 이만하면 유다인들은 제정신이 아니다.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의식의 파탄, 그건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 오늘 복음의 시작은 예수님을 ‘믿는’ 유다인이라 분명히 말한다! - 믿음의 불순함 때문이다. 하느님을 믿으면서, 아브라함을 존경하면서, 심지어 예수님까지 믿으면서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각종 이해관계를 믿음으로 치장한다. 믿음은 유다인들의 욕망을 유지하기 위한 블랙홀과 같다. 오만 가지를 다 던져 놓고도 믿는다고 강변하는 유다인들은 실제 하느님을 죽일 수 있는 살인자들과 맥을 같이한다(8,40).
믿는 것은 하나다. 한 분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말을 전하는 이를 믿고, 아브라함이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든 세상 태초부터 있던 것에 대해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 볼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님이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이 있었다고 하신 말씀은, 태초부터 육체를 갖고 숨을 쉬었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느님과 하나로 이제껏 하느님의 말을 담아내고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과 하느님은 태초부터 하나였다. 본디 하나를 둘로 갈라놓는 것이 사탄이고 악마이며 거짓이고 살인이다. 갈라지는 건 오로지 제 삶이 기대고 싶은 다른 무언가에 몸과 마음이 뺏긴 노예근성 때문이다. 그것을 믿음으로 치장하는 건 민망하거나 유치한 일이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된 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성서신학).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가르치면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과 대중 강연,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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