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요한 복음서 해설: 연대 대 분열(10,1-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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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5 | 조회수6,245 | 추천수0 | |
[요한 복음서 해설] 연대 대 분열(10,1-21)
이달에 읽을 요한 복음은 목자에 관한 이야기다. 예수님은 목자의 비유 이야기를 들려주고(10,1-6), 이어서 당신 자신을 목자에 빗대어 설명한다(10,7-18). 이 두 이야기의 반응이 그리 긍정적인 건 아니다.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고(10,6),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두고 논란을 벌였다(10,19).
목자의 비유는 참된 목자의 진면모를 먼저 소개한다(10,1-3ㄱ). 도둑이나 강도와 대비되는 참된 목자는 ‘문’으로 들어가는 이다(10,2). 문지기는 목자를 알아보고 문을 열어 준다.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는 것으로, 또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아는 것으로 참된 목자는 등장인물들과의 ‘신뢰’를 드러내는 중심축으로 등장한다. 목자의 비유를 읽을 때 우리가 실수하는 것이 이러한 ‘신뢰’ 관계를 도외시하는 것이다. 목자에게만 집중해 목자를 예수님과 곧장 연결해 버림으로써 문지기의 역할, 양들의 역할을 상대적으로 외면한다. 하지만 문지기가 목자를 알아보지 못해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목자는 양들에게 들어가지 못하고,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면 그 목소리는 허공의 메아리일 뿐이다. 앞서 안식일 법을 들이대며 예수님과 논쟁을 펼쳤던 바리사이들을 예수님은 눈먼 이며 죄인이라고 단정했다(9,39-41). 아무리 참된 진리도 듣는 이가 눈을 감고 귀를 닫아 버리면 무용지물이 될 뿐이다. 본래 목자의 비유는 구약에서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관계에서 파생된 개념이다(시편 23; 80,2; 이사 40,10-11).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참된 목자이시며, 그 하느님을 저버리고 제 이익에 눈이 멀어 백성을 잘못 이끌었던 이스라엘의 임금들은 거짓 목자, 나쁜 목자로 하느님과 대비된다(예레 23; 에제 34; 이사 56,9-12). 즉 목자는 양을 통해 그 가치가 돋보이고, 양은 목자의 형상을 통해 하느님을 조우할 수 있다.
‘목자’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서로의 신뢰를 근본으로 하는 관계의 총체다. 하여, 예수님은 자신을 “나는 문이다”라고 계시한다(10,9).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이며 구원과 풀밭을 불러오는 매개체다(10,9). 통로와 매개체로서의 예수님은 어떠한 조건이나 제약을 두지 않는다. ‘누구든지’ 통할 수 있는 문, ‘누구든지’ 생명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출발점으로 예수님은 자리매김한다. 어떤 삶을 살든 예수님을 거치는 이는 구원과 생명을 보장받는다는 사실은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보내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맞닿아 있다(3,16-17).
요한 복음에서 ‘세상’은 이러한 하느님을 거부하는 암흑인 동시에 하느님의 사랑이 놓이는 구원의 대상이다. 이러한 이중적 의미는 ‘문’으로서의 예수님을 이해하는 데 긴요하다. 문은 걸러 내고 통제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들어올 수 있되, ‘모두’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는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구원과 생명은 그것을 원하는 이가 누릴, 무한히 개방된 자리이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이에겐 너무나 폐쇄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런 역설적 논리를 보증하는 유일한 문으로 모두에게 열려 있다(사도 4,12; 1티모 2,5).
그리하여, 예수님은 “착한 목자”다(10,11ㄱ). 윤리 도덕적, 율법적으로 의롭거나 행실이 바르다는 의미가 아니다. ‘착하다’의 그리스어 ‘칼로스’(καλός)는 악과 대비되는 ‘진실하고 올바른 것’을 가리킨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10,11ㄴ). 여기서 ‘착함’은 다시 규정되어야 한다. ‘착함’은 홀로 진실되고 올바른 것이 아니라 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고, 양들을 알고 양들과 함께 지내는 ‘연대’의 가치를 지닌다. 이 ‘착함’에 반反하는 삯꾼은 양 떼를 흩어 버리는 이리를 보고도 달아나며 그로써 양들과의 관계는 소거된다(10,12). ‘착한 목자’인 예수님이 보여 주는 양들과의 연대는 이 지상 것만도, 지금의 것만도 아니다. 목자와 양이 서로 아는 것은 하늘의 아버지와 예수님이 아는 것과 같다고 예수님은 말한다. 예수님이 양들을 알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하늘의 아버지께서 예수님으로서 우리 신앙인들 틈 안에서 죽어 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그 죽음은 하나의 우리(울타리), 한계 지어진 틀 안에서 기념되고 기억되어선 안 된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없는 양들, 아직 그를 모르고, 그를 몰라서 하늘의 아버지도 모르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구원의 길을 열어 놓는다(10,16). 예수님은 그렇게 땅이 하나 되고, 그 땅이 하늘과 하나 되는 ‘연대’의 길을 당신 십자가의 순간까지 지속해서 만들어 갈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물론 육체적 생명의 끝이다. 그럼에도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의 사랑의 시작이고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다(10,17). 이 시작은 예수님의 전적인 자유로 가능하고, 그 자유가 절대적으로 당신의 뜻이라 여기는 아버지 하느님의 배려로 가능하다(10,18). 예수님과 하느님은 이 자유 안에 한 분 하느님으로 조우한다.
문으로서, 목자로서 예수님에겐 오직 하나의 목표가 있을 뿐이다. 그 목표는 요한 복음의 목표이기도 하다. 이 세상이 암흑일지라도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20,31). 이 믿음의 길에 장애가 되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보지 못하고 갈라 세우는 데 익숙해져 버린 마음의 편협함이다(6,52; 7,12.25; 9,8-9.16; 10,19-21; 11,36-37). 유다인들의 논란을(10,19-21) 유심히 바라보자. 그들이 무엇 때문에 논란을 일으키는가. 예수님이 마냥 싫어서, 그의 가르침이 낯설어서일까. 아니다. 유다인들의 논란은, 실은 자신들의 내적 분열에서 온다. 마귀가 들렸다며 예수님을 거부하는 듯하지만, 그들의 눈에 펼쳐진 수많은 표징, 특히 눈먼 이들의 눈을 뜨게 한 것(9장)은 마귀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서 온다는 걸 그들이 알기 때문이다. 눈먼 이를 고치는 것은 메시아 시대의 징표로 유다 사회에 오랫동안 각인되었던 것이다(탈출 4,11; 시편 146,8; 이사 29,18).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신앙이라는 게 별건가…. 다투지 않고 갈라 세우지 않고, 조금씩 양보하며 서로를 보듬는 게 신앙이 아닌가. 사실, 그게 힘들다. 옳고 그름이 명백히 내 안에 자리잡고 있고, 그 옳고 그름이 객관적이지 않음에도 참으로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우리를 힘들게 한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된 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성서신학).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가르치면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과 대중 강연,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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