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요한 복음서 해설: 믿음과 삶(11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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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5 | 조회수7,392 | 추천수0 | |
[요한 복음서 해설] 믿음과 삶(11장)
라자로 이야기는 요한 복음의 앞부분, 즉 ‘표징의 책’(1-12장)이라 불리는 부분의 마지막 표징적 사건이다. 카나 혼인잔치에서부터 예수님은 믿는 이들을 모아들이기 위해 여러 표징을 보여 주셨고, 이제 마지막 일곱 번째 표징인 라자로 이야기를 통해 믿는 이를 재촉하는 이야기를 결말짓는다. ‘영광의 책’으로 불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이야기는 13장부터 펼쳐질 것이다.
‘표징의 책’에서 ‘영광의 책’으로 이어지는 요한 복음의 구조는 말하자면 생명에서 죽음을 향하는 예수님의 역사적 행보를 그려 낸다. 죽음에로의 행보를 시작하기 바로 직전(11,53 참조), 예수님은 라자로를 통해 생명을 이야기하신다. 생명에로의 길은 단순히 살덩이에 숨이 붙어 있는 상황을 향해 방향 지워진 게 아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질문이 생명의 길에서 끊임없이 제기된다. 사실, 라자로를 살리는 일은 다급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느리고도 느리게 진행된다. 라자로가 죽어 갈 만큼 중한 병에 걸렸음에도 예수님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은 라자로의 병을 다르게 규정하신다. ‘하느님 아들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 한다(11,4). 죽음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건, 대개 죽음을 피하고 싶은 인간의 나약한, 혹은 불안한 마음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음을 ‘영광’이라 하신 건 죽음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런 게 아니다. 그 ‘영광’은 죽음의 자리 안에 밝게 드러날 ‘영광’을 뜻한다. 라자로의 죽음에서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생명을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과 생명의 대립이라는 흑백논리로 영광을 이해해선 안 된다. 병을 앓는 라자로가 죽기를 바라는 듯 느리게 움직이는 예수님은 죽음의 자리에서 무엇이 영광인지 말하고자 하신다.
인간의 논리가 유독 완고하거나 폐쇄적임을 증명하듯 제자들이 등장한다(11,8-10). 제자들은 유다 땅을 죽음의 장소로 인식한다. 이에 예수님은 빛을 이야기한다. 빛이 있으면 넘어질리가 없다. 말하자면, 예수님(빛)이 계시면 죽음은 없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것이다. 빛으로서 예수님은 라자로의 어둠, 곧 죽음을 없애러 가는 것(11,11)이고 유다 땅은 죽음의 자리가 아니라 생명의 자리가 될 것이다. 다만 그전에 제자들의 변화는 필요하다. 생명이 왔으나,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제자들은 여전히 죽음의 상태에 놓여 있으니까 말이다. 토마스의 외침은 결연한 것이긴 하지만 빗나간 외침이다.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11,16).
라자로의 일을 두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한 교육의 자리를 펼치신다. 제자들에겐 ‘신앙’이 필요하다. 신앙은 제자들에게 해방이고 탈출이어야 한다. 유다를 죽음의 자리로 여기는 강박관념, 라자로는 죽을 병에 걸렸으니 죽을 거라는 강박관념, 이로 인해 지금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는 무지함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끄집어내셔야 했다.
교육의 대상은 제자들로 시작해서 마르타로 이어진다(11,21-22). 마르타에게 예수님은 치유자로 인식될 뿐이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 이 말투는 예수님의 시간을 둘로 찢어 놓는다. 예수님의 치유 능력은 라자로가 살아 있던 시간 즉 과거에만 가능했다는 것, 그래서 지금은 예수님이 소용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여기, 이 순간에만 필요하다’는 논리, 그리 낯설지 않다. 입시, 취업, 건강, 행복, 성공을 위한 순간에는 예수님이 강력히 요청되나 그 외의 일상에선 예수님이 소외되거나 유폐되는 현상, 그리 낯설지 않다.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이 삶의 근본이 아닌 삶의 지렛대로 마르타의 논리 저변에 무겁게 내려앉아 있다.
예수님은 마르타에게 라자로가 살아날 것이라 말씀하셨고(11,23) 마르타는 그 말을 믿는다고 한다. 하지만 생명에 대한 믿음은 ‘아직’이다. 마르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마지막 날’이라는 유다의 희망을 재확인할 뿐이다(11,24).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마르타는(11,27) 예수님의 질문에 적확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지만 지금, 여기서 라자로를 살릴 생명 그 자체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은 사후 세계의 희망이 아니다. 마지막 날에 주어질 선물이나 보상도 아니다. 지금 여기서 벌어질 구체적 사건이고 상황이다. 요한 복음은 이런 사실을 여태 강조해 왔다(3,16; 5,24-25; 11,25-26; 20,31).
생명은 그리하여 예수님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 ‘지금, 여기’에 대한 사유와 반성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기존 습속과 가치관을 예수님에게 투사하고 있는가, 그렇기에 늘 예수님을 저만치 밀쳐 내고 예수님과 나 사이에 세상 것을 마구 끼워 넣고 있는 건 아닌가. 이러저러한 반성이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을 여전히 지금이 아닌 ‘아직’의 상태로 내몰고 있는 듯하다.
마리아에게서도 마르타의 논리는 여전하다(11,32). 예수님은 죽음에 허덕이는 인간의 나약함에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11,33). 그리스어로 ‘마음이 북받치다’는 ‘엠브리마오마이(ἐμβριμάομαι)’이다. 직역하면 ‘말(馬)과 같이 콧방귀를 끼다’ 정도가 된다. 즉, 화가 났거나 불쾌할 때, 그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행동이 이 동사에 담겨 있다. 예수님은 라자로의 죽음과 그 죽음의 세계에 파묻혀 생명의 주인으로, 메시아로 온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마리아와 유다인들에게 강한 반감을 드러내고 계신 것이다. 유다인들은 그런 예수님을 두고 라자로를 끔찍이 사랑하셨다고 여긴다(11,36).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선생일 뿐이다.
예수님은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또다시 북받치는 감정을 표현한다(11,38-40).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인간의 논리와 하느님의 논리는 정확히 맞붙는다. 무덤의 돌을 치우는 건, 완고하고 폐쇄적인 인간의 논리를 끝내는, 그 무모함과 불신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현존은 정확히 인간의 한계에서 시작한다. 필요한 건 딱 하나, 예수님의 말 한마디다. 죽음을 넘어서 생명으로 라자로를 불러내는 건, 예수님의 말 한마디, 딱 그것이면 되었다. 신적 능력의 초월성이나 우월성을 강조하자는 게 아니다. 애당초 예수님은 생명이었고, 그로써 이 세상의 메시아였다. 메시아가 함께하는 자리엔 죽음이 함께하지 못한다는 게 신앙의 핵심이었고, 그 신앙은 ‘지금 여기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라자로의 생명을 통해 입증된다. 제자들, 마르타, 마리아의 ‘아직’이 라자로의 되살아남으로 ‘지금’이 되었다.
라자로가 되살아난 사건은 예수님 부활에 대한 전조적 표징이다. 예수님의 빈 무덤 이야기와 연결되고(20,5-7), 죽으러 가자던 토마스의 부활에 대한 고백으로 이어진다(20,24-29). 그러나 이 표징적 사건은 누구에겐 폭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예컨대, 유다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은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 인간 세상의 권위는 하느님의 생명을 말살하는 데 집중된다(11,53).
라자로의 이야기는 믿음으로 삶을 꾸려 가야 함을, 삶이 곧 믿음의 현장임을 깨닫는 자리다. 각자가 만나는 예수님은 다를지라도, 그 예수님을 통해 제 삶의 자리를 무시하거나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라자로를 통해 기억해야 한다. 사는 건 믿는 것이되, 믿음이 지금 삶이 아닌 다른 곳을 지향한다면 우린 여전히 지금 여기에 온 예수님을 가로막거나 죽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삶에 대한 냉철한 사유를 통해 예수님은 지금 여기 살아 계신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된 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성서신학).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가르치면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과 대중 강연,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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