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요한 복음서 해설: To Be or Not To Be(12,1-3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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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5 | 조회수6,540 | 추천수1 | |
[요한 복음서 해설] To Be or Not To Be(12,1-36)
이야기의 시작은 잔치다. 라자로를 살려낸 예수를 위해 마을은 잔치로 흥겨웠다. 잔치는 생명에 대한 감사고, 예수에 대한 경배다. 이를테면 성경이 말하는 대로 이야기의 중심엔 예수가 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12,2)
마리아의 행동은 잔치 분위기를 깨뜨리기에 충분했다. 값비싼 나르드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서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을 닦기까지 했다. 값비싼 향유로 발을 닦는 일은 상식적인 행위가 아니다. 더욱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여인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는 행동은 유다 사회의 풍습에서 낯설고 불편하며 그래서 지탄의 대상이 된다. 마리아는 예수를 위한 잔치를 망치고 있는 것일까.
적어도 유다에겐 그랬다. 비싼 향유의 값어치에 관심이 많은 유다는 도둑이었다(12,6). 스승인 예수조차 팔아넘기길 마다하지 않은 유다(12,4)에게, 예수에 대한 관심이나 가난한 이에 대한 배려는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다.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에게 온전히 집중된 반면, 유다의 계산은 향유의 경제적 가치에 집중된다. 유다는 자신과 예수 사이에 삼백 데나리온으로 대변되는 거대한 장벽을 세워 놓았다. 향유의 값이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사실을, 마리아 역시 모를 리 없었을텐데 마리아는 그 값비싼 장벽을 뛰어넘어 예수에게 내달렸다. 상식의 벽, 관습의 벽을 뛰어넘었다. 어쩌면 마리아야말로 ‘예수를 위하여’ 베풀어진 잔치에 가장 합당한 인물이 아닐까(12,2).
향유 냄새는 집안 가득 퍼졌다. 유다의 셈법도, 주위의 불편한 시선도 향유 냄새를 막지 못한다. 향유는 오로지 예수를 위한 것이었고, 향유 냄새가 온 집안을 가득 채운 건 예수를 향한 마리아의 행동이 온 집안에 가득 찬 것과 같다. 우리는 요한 11장에서 죽음의 냄새를 기억한다. 라자로가 무덤 안에 있을 때, 마르타는 나흘이나 지난 시신 냄새를 언급하며 예수를 막아섰다(11,39). 마르타는 예수를 받아들이기 이전에 라자로의 죽음에 짓눌려 있었고, 인간 한계의 끝자락인 죽음 때문에 생명인 예수를 거부했다. 예수는 죽음에 갇힌 라자로를 살려 냄으로써 생명이며 부활인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베타니아에서 마리아는 마르타와 달랐다. 잔치에서 보여 준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만을 향했다. 그런데, 마리아의 행동에 대한 예수의 평가는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마리아의 행동을 자신의 장례 날을 위한 것이라 규정하기 때문이다(12,7). 물론 예수는 곧 죽을 것이다. 그러나 향유의 냄새가 생명의 냄새가 되기 위해선, 예수는 살아야 한다. 죽지 않고 늘 생명이요, 부활로 살아 있어야 한다. 예수는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요한 복음의 독보적 가치는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죽음이 끝이 아닌 생명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요한 복음은 말하고자 한다. 예수는 생명을 주러 온 당신을 어떻게든 없애려는 세상 권력과 죽음의 위협에 맞서 지상 삶을 이어갔다(12,9-11). 그 삶의 끝이 예루살렘에서 맞닥뜨리는 십자가란 사실은 너무나 자명하다.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에, 예수는 마치 임금과 같이 입성한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승리한 임금을 맞이하듯 환호했다. 고대 근동의 임금들이 전장에 나가 승리한 후 돌아올 때의 장면과 닮았다. 죽음의 길은 승리의 길로 채색돼 있다. 죽음은 생명이요, 생명은 죽음으로 가능하다는 논리가 요한 복음의 역설적인, 그러나 독보적인 가치다.
이러한 가치는 예수를 향한 군중의 외침에서도 엿볼 수 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12,13; 시편 118,26). 십자가를 향하는 예수가 진정한 메시아라는 사실이 군중의 입을 통해 선포된다. 그러나 예수가 바라고 그려 내는 메시아는 세상이 기대하는 메시아가 아니었다(6,15).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는 말이 아닌 나귀를 타고 있다(12,15). 요한 복음 저자는 예수를 겸손한 메시아로 표현한다(즈카 9,9). 예수는 세상 위에 군림하는 임금이 아닌 겸손한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것이며 십자가는 그 겸손에 가장 걸맞는 표징이 될 것이다.
가장 높은 데를 향하는 인간의 습성은 가장 낮은 데를 마다하지 않는 메시아 예수의 삶과 엇박자를 낸다. 그럼에도 간혹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자신의 기존 습성에서 해방되어 예수를 제대로 따르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그리스 사람 몇몇이 그러했다. 축제 때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그들은 ‘신을 두려워한 이들’이었다. 대개 그리스 사람들은 신들의 세계를 인정하며 제 삶을 지켜 줄 신을 찾아 나섰다. 그들 중 몇몇이 예수를 신으로 고백하며 다가선 것이다. 나귀를 탈 만큼 겸손하고, 십자가를 질 만큼 어리석은 예수를 신의 반열에 올려놓고 받아들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텐데, 그리스 사람 몇몇은 예수를 찾았다(12,21). 요한 복음 시작에서 예수를 찾아 나선 제자들의 모습과도 많이 닮았다(1,38.40.43-44).
찾아 나서는 자리에서 예수는 하나의 ‘시간’을 제시한다. 예수 자신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다다랐다는 것인데, 우리는 진즉부터 이 ‘시간’을 위해 요한 복음을 읽어 온 터였다. 카나의 혼인잔치부터 예수의 그 ‘시간’은 중요했다(2,4). 예수는 그 시간의 성격을 밀알로 쉽게 풀어 설명한다. 밀알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 자신의 십자가상 죽음이 끝이 아닌 새로운 생명의 시작임을 알린다(12,24-25). 주인공의 장렬한 희생으로 다른 이를 살려 내는 헐리우드식 영웅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다. 죽음이 곧 생명이라는 사실을 예수는 말하고자 한다. 예수는 분명 자신의 ‘시간’을 영광의 때라고 했다. 그리고 그 ‘시간’은 괴롭고 힘들어 피하고 싶은 시간이기도 했다(12,27). 그러나 그 시간으로 아버지의 이름은 영광스럽게 되고, 많은 이가 생명을 얻어 누릴 것이다(12,25.32). 죽음이 생명이라는 역설이 예수의 시간이고, 예수는 그것 때문에 세상에 왔으며 세상에서 살았다(12,27).
예수의 삶은 이제 점점 더 죽음으로 치닫는다. 그럼에도 예수는 계속 생명을 이야기하고 승리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장례를 기억하는 마리아를 시작으로 이 세상에서 온전히 내려놓고 비워 냄으로써 자신의 지상 삶을 정리하고자 하는 예수는, 사는 것을 완전히 내려놓음으로써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삶의 마감이 생명이 될 수 있는 건, 삶에 대한 집착이 아닌 해방을 통해 가능하다. 해방은 지금의 자리에 대한 부질없는 욕망과 이기적 계산을 부끄럽게 한다. 엄청난 경제력으로 호의호식하며 세상 위에 군림하듯 사는 이들은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제 목숨을 이미 끊어 버린 이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늘 배고프고 부족하여 더 채우는 데만 혈안이 된다. 아무리 화려한 성공을 이룬다 해도 우리 모두는 늙어 가고 죽어 간다. 그러므로 인생을 부여잡고 버티기보다 인생을 비워 내고 내려놓는 데서 고유한 생명은 시작될 것이다. 예수가 가르치고 걸어가는 생명의 길은 죽어야 가능한 꽤나 어려운 길이지만, 애써 버티며 제 삶을 고수하는 일보다야 쉽지 않겠나. 그냥 잠시 모든 짐을 내려놓는 데서 예수의 죽음은 생명으로 각인된다. 내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는 내가 나로 서 있느냐, 아니면 내가 다른 무엇으로 서 있느냐의 문제다. 예수는 순전히 자신으로 서 있었다. 그래서 죽었으나 다시 살게 될 것이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나는 정말 살아 있는가, 아니면 죽어 있는가.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된 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성서신학).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가르치면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과 대중 강연,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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