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요한 복음서 해설: 사랑과 배신(13,1-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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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5 | 조회수7,039 | 추천수0 | |
[요한 복음서 해설] 사랑과 배신(13,1-30)
이른바 ‘영광의 책’이라 불리는 요한 복음의 두 번째 부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공관복음이 ‘최후의 만찬’의 형식과 의미에 집중하는 반면, 요한 복음은 예수님이 죽기까지 보여 주신 인간에 대한 사랑을, 그 끝없는 헌신을 만찬 자리를 빌려 강조한다.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은 죽음의 자리다.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슬픔이나 절망 혹은 패배로 이해하기 쉬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요한 복음에서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걸어온 지상 삶이 사랑으로 열매 맺는 자리다. 예수님이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은 세상의 미움과 질투, 그리고 위협에 자신을 스스로 내놓는 십자가라는 사실을 요한 복음은 13장 이후로 강조할 터이다. 타인을 위한 고귀한 희생으로, 그리하여 끝없이 내주는 사랑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그려질 터이다.
요한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입을 통해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지칭한 바 있다(1,29.36). 이스라엘을 살리는 희생양으로서(탈출 12장), 고난받는 주님의 종으로서(이사 53장) 어린양의 운명은 고달팠고 힘겨웠다. 어린양의 희생은 세상의 논리에서 보자면 단지 허망하고 억울할 뿐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세상이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 세상이 외면하고 실패로 규정하는 자리에서 실현될 것이다.
그 실현의 첫 단추를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가 꿰고 있다. 예수님을 팔아넘기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가는 유다를 두고 요한 복음은 악마와 뜻을 같이한다고까지 말한다(13,2). 예수님이 의도했든 안 했든 죽음을 향해 치닫는 이야기의 흐름은 명확하고, 유다는 그 흐름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간다. 문제는 예수님이 유다의 의도와 그 의도에 따른 결과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데 있다. 자신이 죽을 줄 알면서 유다를 그냥 둔다는 것은, 죽음에 끌려가는 게 아니라 죽음에 담대히 맞서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은 이 대목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긴다. 배신이라는 극단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보여 주신 끝없는 사랑의 행동은 그분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을 뚜렷이 드러낸다. 사랑, 그것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선한 의지의 표현만이 아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행위는, 스스로 노예로서 처신하는 것이다. 철저히 자기를 낮춘 자리, 스승이 노예로서 행동하는 절대적 수동의 자리가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리다.
수동의 자리는 세상이 바라는 능동적 행동들을 받아 내는 자리이지 스스로 능동의 주체가 되는 자리가 아니다. 예수님은 발을 씻으려는 당신을 만류하는 베드로와의 대화 끝에 유다의 배신에 대해 언급한다. 배신의 탓을 유다에게 돌려, 그의 책임을 묻는 게 아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행하는 자리에 배신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담담하고 건조하게 짚어 낼 뿐이다. 좋은 일, 선한 일, 자비로운 일을 행하는데 거기에 배신을 하다니, 도무지 이해되지 않지만, 가만히 우리의 일상을 살펴보면 우리도 다르지 않다. 자식에 대한 사랑, 남편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사랑을 진정으로 자식, 남편, 세상의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는 데서 시작하는지 우리의 태도를 찬찬히 살펴보자. 우리의 능동적인 선한 의지가 오해받고 왜곡된 채 무시당할 때,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적은 없었는가. 우리는 제 선한 의지의 능동적 주체로서만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남이야 어찌되었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깨끗하다고 말씀하셨다. 깨끗함을 윤리 · 도덕적 혹은 사회 관습적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15,2). 깨끗하다는 것은 먼저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머무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그 관계는 하느님과의 일치로 직결된다. 요한 복음은 이런 아버지 하느님, 아들 예수님, 그리고 믿는 이의 일치를 자주 언급한다. 다만 일치는 회개를 전제해야 한다(1요한 1,9).
예수님과의 일치는 거룩한 구원이나 보상을 염두에 둔 사업이 되어선 안 된다. 예수님과의 일치는 ‘수동의 영성’, 즉 미움을 미움으로 갚지 않고, 보복에 보복으로 저항하지 않으며, 죽임에 죽임으로 응수하지 않는 한없는 겸손과 희생의 영성을 사는 것이며, 이러한 예수님과의 일치에 머무는 것이 곧 예수님이 말하는 깨끗함이다. 깨끗함은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겨 서로에게 온전히 머물 수 있는 친교와 배려의 자세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후, 수동의 영성을 살아갈 준거를 제시한다. 스승의 가치를 종의 가치와 연결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종이 될 수 있는 구체적 행동을 실천하라고 가르치신다. ‘서로’ 발을 씻어 주라는 것이다. 여기엔 어떠한 계급도,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각자의 고귀함과 소중함을 잊으란 게 아니다. 무작정 자신을 낮추어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는 좋지 않다. 그건 자기비하로 빠지기 쉽다. 서로에 대한 배려는 서로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지, 나의 겸손함을 무작정 부추기는 희생이나 극기와는 다르다.
시편 41,10에 언급된 대로 예수님은 유다에 의해 거부당한다. 고대 근동지역에서 발꿈치를 치켜드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나 경멸의 태도를 의미했다. 예수님은 유다의 비난과 경멸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히 받아들이신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13,27) 하며 유다의 배신에 적극적으로 대처한다. 대개의 주석학자는 예수님의 이런 태도를 수난을 향한 절대적 주도권의 행사로 이해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을 갈망한 게 아니다. 그를 배척하는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이 십자가였고, 사랑이 컸기에 죽음을 감당해 내신 것이다.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주도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자신을 팔아넘기는 유다를 두고 마음이 산란하셨다(13,21). 그럼에도 배신에 저항으로 맞서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려 덤벼드는 제자의 일을 자기 일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 일은 하느님 아버지의 일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일은 이 세상이 배척하더라도 세상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일지라도.
예수님이 이 일을 위해 우리 인간에게 요구한 것은 하나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의 모습에서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간절한 바람을 읽을 수 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는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13,23). 원문에는 ‘아나케이마이 엔토 콜포’(ἀνάκειμαι ἐν τῷ κόλπῳ) 곧 ‘가슴에 기댄다’고 되어 있다. 예수님의 자리매김 역시 ‘가슴’과 연관이 있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1,18)이라고 번역된 것 역시 ‘에이미 에이스톤 콜폰’, ‘가슴을 향해 머물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는 단순히 예수님과 동고동락한 역사적 존재이기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제 삶의 자리를 하느님과 예수님과 일치된 자리로 만들어 가는 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던 유다의 일을 자기 일로 받아들였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의 삶 역시 예수님의 그런 삶에 하나 되어 살아가는 지난날, 오늘, 그리고 내일의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유다는 밖으로 나갔다. 시간은 밤이었고 빛으로 이 세상에 온 예수님과 확연히 다른 길을 걷게 된다(13,30).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은 빛이 아닌 어둠의 길로 연결된다. 어둠을 거쳐 빛으로 나가는 게 예수님이 선택한 세상 구원의 길이다. 어둠이라고 배척하고 제거하려는 우리의 편협함을 뛰어넘는 자리에서 어둠은 빛이 된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된 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성서신학). 현재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담당으로 성서 사목 중이며, 대중 강연 ·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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