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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 복음서 해설: 예수님의 고별사(15,1-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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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7,533 추천수0

[요한 복음서 해설] 예수님의 고별사 II(15,1-16,33)

 

 

예수님의 고별사에는 ‘사랑’이란 단어가 가득하다. 사랑은 공동체를 이어 주는 원리이기도 하고(15,1-17), 세상과 구별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참된 모습이기도 하며(15,18-16,4ㄱ), 세상 속에서 꿋꿋이 하느님과 하나 되는 인내의 결실이기도 하다(16,4ㄴ-33).

 

사랑할라치면 제 의지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다. 사랑스러운 사람에게 더 따뜻하게 말하고 더 친절히 대하는 것은 억지가 아닌 기꺼운 마음에서다. 성경은 그 시작부터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사유한 결과다. 창조이야기부터 서로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지를 사유하고 그 조화 안에 하느님의 섭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창세 1장). 행여 인간이 하느님에게서 떠나 제 의지의 포로가 되었을 때도, 하느님은 다시 계약을 맺고 창조 때의 조화로 인간을 초대하신다(창세 9장). 포도밭과 포도나무의 형상은 이런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랑의 관계를 드러내는 전통적 표현이다.

 

다만, 요한 복음이 포도밭의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전통적 가르침을 반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요한 복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포도나무로, 백성은 그 가지로 소개한다. 말하자면 포도나무로서 백성의 자리에 하느님이 직접 함께, 하나로 계신다는 것이다. 인간의 살덩이를 취하신 하느님을 강조하는 요한 복음의 정신은 단순히 하느님과 백성의 계약적 관계를 넘어 ‘하나’로서 일치된 관계를 한층 분명하게 강조한다(1,14).

 

“나는 포도나무요”(15,5)라는 예수님의 자기 규정은 실은 그분의 제자가 되길 지향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자기 규정과도 같다. 포도나무 없이는 포도 열매를 상상할 수 없듯, 포도나무와 포도 열매는 필연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필연’이라는 말에 잠시 머물러 보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선택이 아닌 필연이다. 하느님은 본성상 사랑 자체이시고, 이 세상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흘러넘쳐 탄생한 선물인 까닭이다. 필연은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이고, 필연은 예수님의 삶을 그리스도인들의 삶으로 구체화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운명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예수님의 부재를 극복하며 살아가야 했던 요한 복음 공동체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담아내야 했다. 이러한 고민이 유다 사회와 그리스 문화에서 말하는 이른바, ‘초현실적’이고 ‘탈세속적’인 거룩하고 고결한 천상의 삶이나 고상한 앎으로 향하진 않았다. 그 고민은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세상과 ‘함께’ 지내는 친교에 대한 것이었다. 장밋빛 인생을 위한 각자도생이나 자기 계발의 강박증이 아닌 예수님을 통한 자기 해방과 자기 극복의 훈련이었으며 그 끝은 여전히 이 세상 안에서의 사랑 실천이었다.

 

예수님 안에 머물고 그분처럼 사는 것은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다(15,9). 사랑은 제 의지의 확장이나 제 호감의 표현이 아니다.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은 계명을 지켜야 하는 숙제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서로가 지닌 얼마간의 의지를 내려놓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리를 박차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자기 증여’의 삶을 사셨듯이 우리 신앙인 역시 예수님을 통해 제 삶의 지향과 의지를 고치고 다듬는 ‘자기 포기’의 삶을 살 때, 계명 실천은 사랑이 될 수 있다. 사랑은 서로를 향한 자기로부터의 해방이고, 해방되어 떠나간 곳에서 서로가 만나는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방식이 계명이다.

 

서로가 만나는 자리는 위와 아래, 높음과 낮음이 있을 수 없다. ‘친구’로서 있는 듯 없는 듯해도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그 어떤 정치적 · 경제적 · 사상적 불편함도 웃어넘기고, 애써 하나인 듯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하나가 되어 버려 뭐든 품어 줄 수 있는 자리가 계명의 자리고 사랑의 자리다(15,15-16). 세상은 이런 사랑, 이런 친구, 이런 계명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냐면 세상은 ‘1등’을 기억하고 추구하고 바라니까. 예수님께서 살아간 삶 역시 비난과 외면과 박해로 점철되었고, 그 삶의 질곡은 그리스도인들의 몫이기도 했다(15,18-19). 세상은 친구가 되기보다 제 이익과 호불호에 따라 지향하는 바를 향한 경쟁에 몰두한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세상과 친구가 되고자 했지만, 세상은 죽임으로 예수님을 거부했다. 죽임에 죽음으로 응답하는 것은 사랑의 극치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미워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자세는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이다(16,1).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가지 말아야 하고, 사랑에서 떨어져 나가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을 붙들고 세상과 담을 쌓는 게 아니다. 세상의 미움 한가운데서 의연하게 세상을 향해 자신을 내주는 사랑을 사는 것이다. 미워도 다시 한번 사랑으로, 제 목숨을 내놓는 그 사랑으로 세상 안에 머물러야 한다. 세상은 각각의 경쟁과 탐욕으로 죄를 지을 것이고, 그 죄의 원인은 ‘무지’다(16,3). 모르고 좇아가는 곳이 아무리 훌륭해 보이고 멋져 보이고 정의로워 보여도 무지함으로 시작된 여정의 끝은 자기 상실, 자기 파멸밖에 없다(11,10).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랑을 보여 주시고 이 세상에서 떠나가려 하신다.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키는 ‘떠남’은 제자들을 근심케 한다. 그러나 ‘떠남’은 끝이나 파멸이 아닌 ‘완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고(16,7), 성령은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고쳐 주시기 때문이다(16,8). 세상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는 데 주저하고 외면했다. 세상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이해하기보다 단죄하기 바빴고, 예수님을 통해 의로움을 추구하기보다 세상의 논리와 이해관계에 매몰돼 있었으며, 예수님을 통해 사랑을 배우기보다 서로를 향한 심판에 익숙했다는 사실을 성령께서는 똑똑히 바라보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존재 가치를 세상이 제대로 깨닫게 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랑이고 의로움이며 세상 모든 이를 위해 생명을 주신다는 사실을 세상이 깨닫게 하실 것이다. 이를테면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이라도 여전히 예수님의 가르침이 유효하고 그 가르침이 신앙인들을 통하여 세상에 생생히 드러나고 있음을 일깨우실 것이다(16,14).

 

예수님의 ‘떠남’ 앞에 제자들은 슬퍼한다. 하지만 그들의 슬픔은 이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기쁨의 이유인즉,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이다(16,22).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제자들의 기쁨은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위로가 아닌 예수님의 죽음(떠남)과 부활(다시 오심)을 통해 새로운 시간을 사는 데서 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세상이 어떻든, 예수님께서 계시든 안 계시든 제자들의 삶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살아 내는 새로운 삶으로 전이되어야 한다.

 

새로운 삶은 세상으로부터 주어지는 미움과 박해가 제거된 무릉도원의 삶이 아니다. 여전히 신앙인들은 세상을 거슬러, 세상의 불의와 억압을 견디고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평화를 말씀하신다(16,33). 예수님의 평화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분을 믿는 데서 시작한다(16,30). 예수님을 통해, 그분 덕분에 세상을 사는 것이 한번 해볼 만한 도전이고 보람이라 여기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평화안에 머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그분을 직접 목격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생생하게 듣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도 강조했듯이 요한 복음의 저술 의도는 예수님의 부재, 그러니까 1세기 말엽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믿음을 위해 쓰였다(20,31). 예수님의 평화는 이천 년 전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오늘 우리의 삶으로 되살려 내는 우리 신앙인의 수고로운 실천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그 어려운 걸 제가 해내지 말입니다”라고 예수님께 말씀드릴 수 있는 우리의 사랑 실천이 평화를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조금씩, 차근차근 사랑하며 사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삶의 시작이자 마침이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된 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성서신학). 현재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담당으로 성서 사목 중이며, 대중 강연 ·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6월호(통권 495호), 박병규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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