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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이사야서 해설: 세월이 흐른 뒤에(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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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7,215 추천수0

[이사야서 해설] “세월이 흐른 뒤에”(2,2)

 

 

이사 2,2에서는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세월이 흐른 뒤에”라고 번역된 구절은 사실 여러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표현을 그대로 번역하면 “날들 후에”입니다.

 

그리스어 칠십인역에서는 “마지막 날들에”로 옮깁니다. 여기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곳에서도 칠십인역은 히브리어 성경에 비하여 늦은 시대의 관심사인 종말론에 큰 관심을 두지요. 본래의 히브리어 표현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현대에도 “날들 후에”가 종말을 나타내는 고정된 표현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미래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더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날들 후에”, 곧 지금 흘러가고 있는 역사가 더 흘러 어떤 특정한 날들이 지나고 나서 그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2,2-5에서 묘사한다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날들 후에”는 1장에서 예고된 심판이 있은 다음을 지칭합니다.

 

2,2-5에서 그려 보이는 것은 그날들 후에 나타날 예루살렘의 모습입니다. 그때에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2,2)인 시온 산은 세상의 어떤 산보다도 높아지고,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집으로 모여와 주님의 길을 배우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지금이 아니라 “날들 후에” 있을 일들입니다.

 

 

충실하던 도성이 어쩌다…

 

지금 예루살렘의 모습은 2,2-5에서 말하는 먼 훗날의 모습과 거리가 멉니다. 이사야서 1장에서 예루살렘에 심판을 선고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충실하던 도성이 어쩌다 창녀가 되었는가?”(1,21) 창녀가 되었다는 것, 이사야 예언자보다 앞서 특히 호세아가 사용했던 비유입니다. 신랑이신 주님께 충실해야 할 아내 이스라엘이, 다른 무엇을 따라가고 있다는 의미이지요.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 7,23)라고 맺어진 계약 관계에 금이 갔다는 뜻입니다.

 

“충실하던 도성”이라는 말을 잘 뜯어보면, 또 과거의 언젠가는 예루살렘이 충실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정이 가득하고 정의가 그 안에 깃들어 있었는데”(1,21), 그런데 그 충실하던 도성이 온갖 죄로 더럽혀졌습니다. 1장은 그 죄들을 열거합니다. 미물인 소와 나귀도 임자를 아는데 예루살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알아뵙지 못하고 거역하였습니다(1,2-3). 사람들은 하느님께 숫양과 황소 등 많은 제물을 바치지만, 그들의 손이 피로 가득하기에 하느님은 그 제사를 마다하시고 그들의 기도도 듣지 않으십니다(1,10-17). 고아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고 과부를 돌보아 주지 않는 예루살렘이 바치는 제물을 하느님은 역겨워하십니다. 특히나 사회의 지도층은 부패하여 뇌물을 찾으며, 재판관들은 힘없는 이들의 권리를 찾아 주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1,23).

 

1,29에 언급된 “참나무”와 “정원”은 사람들이 다른 나라의 관습을 받아들여 우상을 숭배했음을 말해 줍니다. 풀과 나무가 겨울이면 죽었다가 봄이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면서 가나안과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민족은 겨울에 죽었던 신들이 봄이면 되살아나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하고 그 신들을 통하여 농사의 풍요를 기원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러한 우상숭배를 시작해 버렸습니다. 다 망하게 생긴 자신의 처지를 알지도 못합니다. 온통 성한 데가 하나도 없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만신창이가 되었는데도, 하느님께 살려 주시라고 애원하기는커녕 더 맞으려고 계속 반항하고 등을 돌립니다(1,4-8).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땅까지 황폐해졌습니다(1,7). 이것이 이스라엘이 처해 있는 ‘파산’ 상태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출구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남겨 주신 이들

 

이렇게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예언자는 또 청개구리 같은 소리를 합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존자들을 조금이나마 남겨 주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소돔처럼 되고 고모라같이 되고 말았으리라”(1,9). 소위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심판 선고 속에 파묻혀 휙 읽고 지나갈 말씀이 아닙니다. ‘남기다’(야타르)라는 단어가 갖는 신학적 무게 때문입니다. 이사야를 포함한 유배 전 예언자들은 전체적으로 심판을 선고하지요. 그런데 그 심판이, ‘남김 없이’ 완전히 멸망시켜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온통 황폐해진 땅이어도, 하느님은 작은 무리를 남겨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사상이 처음 나타나는 스바니야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거만스레 흥겨워하는 자들”(스바 3,11)을 모두 없애시고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스바 3,12)을 남기시리라고 말합니다. 이사야서에서도 남은 자 사상은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남은 자’라고 하기보다 ‘하느님께서 남겨 주신 이들’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요. 그들이 있기에 새로운 시작이 가능합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이사 2,2) 시작될 새 역사는 다른 곳이 아니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2,2), “시온, 예루살렘”(2,3)에서 이루어질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는 “야곱 집안”(2,5)에게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믿기 어렵더라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찌꺼기를 걸러 내시고 불순물을 없애시며, 예루살렘을 다시 예전과 같은 “정의의 도읍”, “충실한 도성”으로 회복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25-26).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세월이 흐른 뒤에”(2,2), 그러한 정화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지금 눈앞에 펼쳐진 예루살렘을 보면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웅대한 미래가 펼쳐질 것입니다.

 

2,2-5의 단락은 이사야서의 뒷부분에 가서 더 전개될 주제들을 담고 있습니다. 다른 민족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사명, 그리고 다른 민족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오게 된다는 주제는 이사야 예언서 제1부(1-39장)보다 각각 제2부(40-55장)와 제3부(56-66장)에서 주로 나타납니다. 예언서 전체의 서두에서 그 결말을 미리 예고하는 것이지요.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2,2). 1장에서 시온이 주로 도성으로 제시되었다면 이 단락에서는 ‘산’으로 이해됩니다. 땅에서 가장 높은 곳인 산은 하늘과 땅을 잇는 곳입니다. 더구나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하느님께서 지상에서 거처하시는 곳이기에 다른 어떤 산보다도 직접 하늘로 연결됩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예루살렘이 저지른 수많은 죄악이 멸망을 통해 정화된 다음에, 그때에는 모든 민족이 바로 그 예루살렘, 창녀가 되었던 바로 그 도성으로 모여들어 그곳에서 주님의 법을 배울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주님의 가르침을 배우기에, 그곳으로부터 온 세상에 평화가 전파되어 나갈 것입니다.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느님께 단죄받고 심판받았던 바로 그 도성이 하느님의 법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곳이 된다는 것은, 개인으로 친다면 흉악범이던 사람이 큰 고통을 통해 변화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는 것에 비길 수 있을까요? 그런데 2,2-5는 아직 정화되지 않은, 아직 흉악범과 같은 예루살렘에 장차 그런 날이 오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예언자의 말입니다. 온통 맞아 터진, 상처투성이 예루살렘에 예언자는 엄청난 미래를 말합니다.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 보자”하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따지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1,18).

 

예루살렘에 요구되는 것은, 믿기 어려운 그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지금은 손이 피로 가득한 불의한 도성이라 할지라도, 그 죄를 눈같이 희게 만드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나의 죄에서 눈길을 돌려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볼 때, 예루살렘은 빛 속을 걷게 될 것입니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2,5)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6년 4월호(통권 481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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