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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이사야서 해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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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8,661 추천수0

[이사야서 해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10,20)

 

 

이사야 예언서 제1부를 복습합시다. 1부 전체를 하나로 묶어 보자는 것입니다. 이 말이 엄청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사야서가 워낙 넓고도 깊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크게 나누어 보아도 세 시대에 걸쳐 이루어진 이 책에서 우리는 그 첫 부분인 1-39장을 지난 한 해 동안 읽었습니다. 기원전 8세기,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라는 인물과 연결된 부분이었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6,3)

 

1-39장이 적은 양은 아닙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활동한 기간을,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6,1)부터 “히즈키야 임금 제십사년”(36,1)까지만 계산해도 40년 정도입니다. 아하즈 시대에 시리아-에프라임 전쟁이 있었고 히즈키야 시대에는 산헤립의 침공이 있었던, 결코 평탄치 않은 40년입니다.

 

이 40년을 담고 있는 이사야서를 요약하는 신학은, 이사야가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에 만났던 하느님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이사야는 높은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뵙는데, 그때에 천사들은 그 하느님을 노래하며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6,3)고 말합니다. 6장에서 보았던 바와 같이 이사야의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 곧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분이십니다. 이사야가 그분 앞에서 “나는 이제 망했다”(6,5)고 했던 바로 그 하느님은, 인간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분이 전혀 아닙니다.

 

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호칭을 자주 사용합니다(1,4; 5,19.24; 10,17.20; 12,6; 17,7; 29,19.23; 30,11.12.15; 31,1). 이사야 예언서 제2부와(41,20; 43,14; 45,11; 47,4; 48,17; 49,7; 54,5; 55,5) 제3부에서도(60,14) 사용된 것으로 보아, 이사야 예언자의 전통을 이어간 이들이 하느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으로 이해하는 전통도 계속 이어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사야서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고 해도 그 세 부분을 하나로 묶어 주는 신학적 요소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사야 시대의 전쟁들

 

이사야가 임금들에게 권고했던 것들 역시 이 거룩하신 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잠시 그 시대의 두 전쟁을 돌아봅시다.

 

아하즈 시대, 아람 임금 르친과 이스라엘 임금 페카가 유다로 쳐들어왔던 시리아-에프라임 전쟁 때에 아하즈는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이사야는 그에게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7,9)고 말하지만, 아하즈는 결국 아시리아에 도움을 청하고 맙니다. 가까이 있는 아람과 이스라엘이 쳐들어올 때, 멀리 있는 강대국의 힘을 빌려 위기를 모면하려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아시리아에 의지하려는 것에 반대합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은 자기들 뜻대로 유다에 새 임금을 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7,7).

 

어쨌든 실제로 아시리아는 아하즈의 요청에 응답하여 전쟁에 개입했고, 유다는 멸망을 피했지만, 이후로 아시리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아시리아가 유다를 도운 것은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겠지요. 곧이어 아람도, 이스라엘도 멸망시킨 아시리아는 더는 유다의 손을 잡아 주지 않습니다. 지난달에 살펴본 바와 같이 아하즈의 아들 히즈키야 시대에는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합니다(36,1). 과거의 우방, 그런 것은 소용없습니다.

 

이사야서에서는 히즈키야가 아하즈와 달리 하느님을 믿었다고 말합니다. 랍 사케가 히즈키야와 백성을 조롱해도, 그들의 신앙을 비웃어도 히즈키야는 오히려 하느님의 성전으로 올라가 하느님을 신뢰하며 기도합니다(37,1). 하지만 히즈키야도 이사야의 비난을 받은 부분이 있습니다. 아시리아가 쳐들어올 때, 이집트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도움을 청하러 이집트로 내려가는 자들! 군마에 의지하는 자들!”(31,1)

 

이집트는 도와주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끝은 ‘주님의 천사가 아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다’는 것입니다(37,36). 유다의 군사력이나 이집트의 군마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아시리아군을 물리치신 것이지요.

 

이사야의 외교 정책은 과연 무엇일까요? 임금들의 입장에서 이사야는 참 대책 없는 사람 같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람이 쳐들어올 때에는 아시리아에 의지하지 말라 하고, 아시리아가 쳐들어올 때는 이집트에 의지하지 말라 합니다. 그럼 도대체 어쩌라는 말일까요?

 

 

거룩하신 하느님과 인간의 역사

 

아시리아의 도움도 청하지 말고, 이집트의 도움도 청하지 말라는 이사야에게 중요한 것은 강대국들 사이에서 의지할 나라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역사는 정치적 또는 군사적 세력에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 흐름을 결정하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계획’, ‘결정’도 이사야서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 중 하나입니다).

 

‘거룩하신 분’의 결정은 인간에 의하여 조작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여러 나라의 운명을 선고하십니다. 아시리아를 막대로 삼아 이스라엘을 치시는 분도 하느님이시고, 그 아시리아가 자신이 하느님의 도구임을 잊고 교만해졌을 때에 아시리아를 꺾으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무조건 이스라엘의 편을 드시는 것도, 무조건 아시리아의 편을 드시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 자신의 결정과 계획에 따라 나라들을 일으키고 또 무너뜨리십니다.

 

그러니, 그 하느님의 계획을 거슬러 나라들이 서로 손을 잡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일입니다. 아람과 북 왕국 이스라엘이 유다를 공격해 와도(시리아-에프라임 전쟁), 하느님께서 다윗 왕조를 지키고자 하실 때에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포위를 해도(산헤립의 침공), 주님의 천사는 하룻밤 사이에 그들을 물리칩니다.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7,9)

 

그러나 이 ‘믿음’은 결코 작은 요구가 아닙니다. 적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했는데, 어찌 임금이 살길을 도모하지 않고 가만히 손을 놓고 있겠습니까? 이사야는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 내맡기는 믿음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싸우는 것보다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사야는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7,9)고 말합니다. 많은 계획을 세우고 도움을 청하고 힘을 길러도, 믿음이 없다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믿음은, 믿기만 하면 절대 망하지 않는 자동적인 장치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분이기도 하십니다. 이사야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6장), 그에게는 이스라엘에 심판을 선고하라는 사명이 주어집니다. 인간적인 힘에 의지하려는 이스라엘에 하느님은 심판을 선고하십니다. 정의와 공정이 아닌 피 흘림과 울부짖음을 열매 맺는 이스라엘에 하느님은 심판을 선고하십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 심판까지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치실 때에도, 멸망하게 하실 때에도 하느님의 계획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멸망을 선포하라는 하느님께 “주님, 언제까지입니까?”(6,11)라고 물었던 이사야처럼,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사야라는 이름은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지요. 이사야서 안에는 분명 구원의 약속들이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구원은 심판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구원이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서 제2부와 제3부로 가면, 멸망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되는 더 넓은 전망이 눈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유배 전 예언자들이 모두 그렇듯이 기원전 8세기의 이사야는 주로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심판을 선고한 예언자였습니다. 이사야는, 심판과 전쟁과 멸망 속에서조차 구원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라고 말해 줍니다. 그것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하늘의 지혜》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7년 1월호(통권 490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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