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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이사야서 해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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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8,112 추천수0

[이사야서 해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42,1)

 

 

추리 소설을 제대로 즐기려면 호기심을 참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오직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소설 전체를 읽지는 않지요. 범인만 알려고 한다면 중간 부분은 건너뛰고 처음과 끝만 읽으면 됩니다. 하지만 범인을 찾는 과정이 중요하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들의 모습과 세상에 대한 이해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끝까지 범인을 찾지 못하더라도 훌륭한 문학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종은 누구인가?

 

이사야 예언서 제2부(40-55장)의 특징 중 하나는 ‘주님의 종’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의 종은 누구인가?’라는 질문만을 품고 본문에 다가가면 많은 것을 놓치고 맙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 ‘주님의 종’의 노래들의 공통점은 종이 누구인지 한마디로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종이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주님의 종의 노래’라고 불리는 본문들이 어떻게 ‘발견된’ 것인지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 있는 파란색 소제목들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 등은 성경 원문에는 들어 있지 않지요. 그런데 40-55장에는 ‘종’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는 편입니다. 이십여 회 되지요. 그중 대부분 ‘종’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아, 너는 나의 종이다”(44,21)라는 식입니다(41,8-9; 44,1-2; 45,4; 48,20 등).

 

‘종’이 이스라엘이 아닌 듯이 보이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종’이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지칭하기보다 한 개인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 종이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어떤 사명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종은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나타납니다. 이런 부분들을 지칭하여, 19세기 말에 독일 학자 둠(B. Duhm)이 ‘주님의 종의 노래’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 노래들의 시작과 끝을 어디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조금씩 다른 부분도 없지 않지만, 《성경》에서는 42,1-9을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 49,1-7을 둘째 노래, 50,4-11을 셋째 노래, 52,13-53,12을 넷째 노래로 봅니다.

 

종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라집니다. 일단 네 노래에 나오는 종을 동일 인물로 단정 짓기가 어렵습니다. 네 노래에는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적지 않습니다. ‘종’을 이 예언서가 작성되던 시대의 역사적 인물로 보기도 하고, 미래에 올 인물에 대한 예언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 인물은 임금이나 위대한 예언자 또는 메시아일 수 있습니다. 앞으로 각 노래에 대해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것입니다.

 

또 하나 기억할 점은, 둠은 ‘종’이 이스라엘을 지칭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들을 주님의 종의 노래라고 했지만, 이와 달리 이 노래들에 대해서도 종을 이스라엘로 보는 이들도 있다는 점입니다.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이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이 정도 해 두고 이제 주님의 노래들을 하나씩 읽어봅시다. ‘종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아직 남아 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님을 기억합시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42,1)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42,1).

 

어떤 인물을 사람들에게 소개하시는 것으로 보여서 이 부분을 종의 임명식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종이 누구인지는 바로 나오지 않으니 이 단락이 ‘종의 노래’라고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그 종은 누구일까요?(나쁜 질문입니다) 여기서도 종을 이스라엘이라고 보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노래에서 종에 대해 사용된 표현들인 ‘붙들어 주다’와 ‘선택하다’는 바로 앞 장인 41장에서 이스라엘에 적용되었던 단어들입니다(41,8.10). 하느님께서 손을 붙잡아 주셨다는 것(42,6)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종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해도 그 종을 이스라엘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고대에 이 본문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이에게도 이 종은 분명 이스라엘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42,1의 “나의 종”에 “야곱”을 덧붙였고 “내가 선택한 이”에는 “이스라엘”을 첨가했습니다. 고대의 이스라엘인들이 전통적으로 본문을 그렇게 이해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42,1)

 

하지만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주님의 종의 노래들에서 종은, 한 민족이라기보다 한 개인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붙들어 주신다는 말은 개인에게 더 잘 어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 영을 주신다는 것도(42,1) 주님께서 선택하신 판관이나 임금(사울, 다윗 등)과 예언자들에게 주로 사용되었던 표현입니다.

 

특히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는 것은(42,1) 임금의 역할이고, 이 본문의 바로 앞 문맥을 생각하면 그 임금은 페르시아의 키루스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주님께서 “해뜨는 곳”인 동쪽 페르시아에서 그를 지명하여 부르셨고, 그는 바빌론을 점령해 “북쪽에서” 일어납니다.

 

키루스는 여러 민족을 정복했습니다(“통치자들을 진흙처럼 짓밟으리라”: 41,25). 이전의 정복자들인 아시리아나 바빌론과는 달리 페르시아는 정복된 민족들에게 관용적인 정책을 폈습니다. 키루스는 다른 억압자들처럼 외치거나 소리를 높이지 않았고(42,2), 부러진 갈대, 꺼져 가는 심지 같은(42,3) 다른 민족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섬들”(42,4) 곧 여러 민족이 그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바빌론에 유배 가 있던 이스라엘에도 귀향을 허락했기 때문에(“풀어 주기 위함이다”: 42,7), 이스라엘 백성에게 키루스는 정의를 펼치는 구원자와 같았습니다.

 

키루스 외에 다른 역사적 인물을 주님의 종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소수 의견으로는 모세, 즈루빠벨, 다리우스 등을 ‘종’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42,6)라는 구절에서 예레미야를 연상하면서 여기서 말하는 ‘종’이 이 본문을 쓴 예언자 자신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나의 종”(42,1)

 

다시 첫머리로 돌아갑니다. 42,1과 다른 모든 종의 노래들에서 ‘종’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에벳’입니다. 70인역에서는 ‘에벳’을 그리스어 ‘파이스’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파이스’는 ‘종’만 아니라 ‘아이’, ‘아들’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저자들은 그리스어로 옮긴 이 구절(42,1)을 생각하면서,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에서 그 말씀을 인용합니다(마태 3,17; 마르 1,11).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말씀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루카 복음은 거룩한 변모 장면에서 같은 구절을 인용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더욱이 마태 12,18-21에서는 42,1-4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면서 예수님이 온유한 메시아이심을 말해 줍니다. ‘부러진 갈대, 꺼져 가는 심지’(42,3)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죽어 가는 이들을 살리는 충실한 예언자의 모습이 예수님에게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다시, 주님의 종은 누구인가?

 

이렇게 보면 여러 해석이 모두 근거가 있어 보입니다. 사실입니다. 유다교의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종의 노래들에서도 종을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하고, 첫째 노래에서 종에게 적용된 표현들이 이사야서 다른 부분에서는 이스라엘에 사용되었음을 지적합니다.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에서 ‘종’을 한 개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 노래에 묘사된 종이 임금 또는 예언자의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는 이미 이 노래를 신약성경에서 인용해 예수님의 공생활을 해석했습니다.

 

아직 둘째, 셋째, 넷째 노래들이 남아 있으므로 결론은 내리지 않겠습니다. 아직은 추리 소설 마지막 페이지를 열어 볼 때가 아닙니다. “종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잠깐 덮어 둡시다. 그러면 다른 많은 것이 보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종을 선택하고 붙들어 주시며, 그 종은 꺼져 가는 심지를 되살려 가며 세상에 공정을 폅니다. 그렇다면 섬들(여러 민족)도 그의 가르침을 기다린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종이 누구이든, 세상은 –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민족들도 – 그런 종을 기다립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하늘의 지혜》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7년 4월호(통권 493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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