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이사야서 해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58,5)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성경용어] 그리스도교 교회는 보편 교회와 개별 교회로 구성되어 있다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5 | 조회수8,050 | 추천수0 | |
[이사야서 해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58,5)
어느 해인가 대림 시기 동안, 공동체에서 몇 가지 약속을 정하고 특별히 노력을 하기로 한 적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기도 시간에 늦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약속을 해 놓고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약속은 뭐하러 하는 거야!’ 한참 화를 내다 보니, 우리가 약속한 것이 또 있었다는 사실이 생각났습니다. 화를 내지 않기로 한 약속이었습니다. 아…! 이사야서 58장이 생각났습니다. 하느님이 바라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58,3)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라고 설교하는 이사야 예언서 제3부에서, 58장은 특히 단식을 주제로 합니다. 참된 단식, 이 주제는 예언서들에서 고전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전부터 그래 왔듯이, 유배에서 돌아온 후의 공동체에서도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그분의 은혜를 얻을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안식일과 단식으로 하느님의 은혜를 얻으려 합니다. 성전이 무너지고 없기 때문에 제사를 바칠 수 없게 된 상황에서는 그를 대신하는 단식과 같은 신심 행위들이 중요성을 띠게 되지요. 단식일이라는 날에는 하느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희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구원은 이런 신심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정의를 실천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이스라엘이 유배에서 돌아왔을 때, 온 땅은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백성들은 (적어도 그 일부는) 하느님이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58,3) 내가 이만큼 단식하고 기도하고 있으니, 하느님이 우리를 보아 주시고 우리의 처지를 알아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이기적인 마음에서인지 아니면 진실로 하느님을 찾는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58,2)이라는 표현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뜻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공정’이라는 두 단어가 눈에 들어오지요? 이사 56-66장의 핵심 열쇠였습니다. 이 백성은 안식일을 지키고 단식도 꼬박꼬박 하지만, 정말로 하느님이 바라는 정의와 공정은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 백성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든 구원을 받기 위해서든 하느님께 가까이 가고 있지만, 정의와 공정을 위한 노력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다음 구절들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됩니다.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이사 58,3).
단식을 하는데 하느님이 보아 주지 않으신다고 불평을 하는 것은, 단식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한 중요한 행위들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러 단식일을 만들고 있지만, 그 결과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쳐다보지도 않으십니다. 그래서 3절의 질문이 나옵니다.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이 질문에는 불만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질문이 하느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갑자기, 도입 구절도 없이 하느님의 말씀이 – 하느님의 고발이 – 쏟아져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이유는 이기심, 탐욕,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다툼에 있습니다(58,3-4). 그들은 단식을 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을 계속하고, 일꾼들에게 가혹하게 일을 강요합니다. 다툼과 분쟁을 일으키고 폭력을 휘두르면서 동시에 단식을 합니다. 그들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그들의 형제들인 이웃을 괴롭힙니다.
5-7절에서는 단식과 함께 행하는 고행들에 대해서도 고발합니다. 무의미한 이런 행위들을 보시며 하느님은, 진정한 단식은 이웃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58,6)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을 설명하는 6절에는 자유와 연관된 네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58,6)
여기서는 비유적인 표현들이 사용되기 때문에, 구체적인 의미를 아주 정확히 밝히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비슷한 단어들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하나씩 그 의미를 파헤치기보다 전반적으로 조금 넓게 해석해도 될 듯합니다. 자유와 해방이라는 주제가 이 절 전체의 핵심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꼭 감옥에서 석방시킨다는 의미로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본문은 감옥을 지칭하는 구체적이고 특수한 단어들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슬, 결박, 멍에라는 표현은 감옥에 사람을 묶어 놓는 것만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압박하는 불법적인 계약, 이자, 돈놀이 등을 지칭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생각한다면, 저자(예언자)는 정치 · 경제 · 사회 · 종교적 온갖 억압의 종식을 요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유배의 체험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습니다. 키루스의 칙령을 통해 바빌론의 유배에서 풀려난 후, 유다인들이 마치 바빌론인들이 했던 것과 같이 동족을 대하고 있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약속의 땅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땅 종살이를 기억하며 이방인들을 받아들여야 했듯이(신명 24,18 참조), 바빌론에서 겪은 체험은 다른 이들을 어떤 식으로도 억압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기에서 보듯이 당시의 실정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유다인들 사이에서 돈놀이를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고 느헤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서로 돈놀이를 하고 있군요. … 우리는 이민족에게 팔려 간 유다인 동포들을 우리 힘이 닿는 대로 도로 사 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동포들을 팔아먹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더러 도로 사 오라는 말입니까?”(느헤 5,7-8) 동족을 억압하는 이들에게 하느님도 그렇게 말씀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58,7)
이렇게 6절이 ‘억압받는 이들’에 대해 말했다면, 7절은 ‘굶주린 이들, 집이 없고 입을 것이 없는 가난한 이들’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과 음식, 집, 옷을 나누는 것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바라시는 일입니다. 7절의 마지막 구절,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라는 말은 그러한 요구들을 요약해 줍니다. 여기에서 “네 혈육”이라고 번역된 말을 글자 그대로 옮긴다면 ‘너의 살, 너 자신의 살’이 됩니다. 물론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는 친족을 지칭하여 사용되지만, 저자는 이 말을 통해 간접적으로 불의의 근본적인 원인을 드러내 보입니다. 고통받는 이와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 그를 ‘내 살’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 그의 굶주림과 헐벗음과 가난함을 나 자신의 것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 그것을 나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그저 사회문제에 관한 통계 자료처럼만 생각하는 것. 예언자는 이를 개탄합니다. 가난한 이웃의 고통은 바로 너의 고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통받는 이웃은 ‘너의 살’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6-7절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단식을, 고행의 날에 실천해야 할 행위를 말해 줍니다. 그럼 단식은 하지 말까요? 글쎄요, 이것은 이사야서 58장에 던질 질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예언자는 단식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형식적인 단식이 아니라 불의하게 억눌린 이들을 풀어 주고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어 준다면, 하느님이 반드시 응답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58,9).
이사야 예언서 제3부의 주제로 다시 돌아옵니다. 하느님이 응답하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정의와 공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이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을 만들어 주시기만 바랄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세상에서도 다를 것은 없습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구약 종주》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하늘의 지혜》 등 여러 책을 옮겼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