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마태오 복음서: 예수님은 언제 오십니까? - 마태오의 종말 이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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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5 | 조회수7,166 | 추천수0 | |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태오 복음서] 예수님은 언제 오십니까? : 마태오의 종말 이해
“배고파 못 살겠다. 죽기 전에 갈아 보자.” 이승만 대통령이 나라를 이끌던 시절, 야당에서 내건 선거 구호다. 한국 전쟁 이후 서민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웠기에 이런 구호가 나왔을 터다. 부정부패까지 만연했으니 서민들은 더더욱 살기 어려웠으리라. 살기 어려워지고 고통이 쌓여 가면 큰 변화를 기대하기 마련이고, 변화의 조짐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거기에 온통 맘을 뺏기기도 한다. 50-60년대에 유독 신흥종교가 많이 나온 것도 그와 관련이 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험한 세상을 살아야 했던 그리스도인들의 조건도 비슷했다. 정복자 로마의 압제, 의인·죄인의 구별이 분명했던 억압적인 유다 사회, 이방 땅에 몸 붙여 살던 디아스포라 유다인 처지도 모자라 제도권 유다교에서 제거당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었으니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시어 이 세상을 평정해야 우리가 맘을 놓고 살 텐데, 도대체 예수님이 오실 기미조차 보이지 않으니….’ 그런 까닭에 1세기 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자주 오갔다.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마르 13,4),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사도 1,6), “그분의 재림에 관한 약속은 어떻게 되었소? 사실 조상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창조 이래 모든 것이 그대로 있지 않소?”(2베드 3,4), “이자들은 진리에서 빗나가,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말하면서 몇몇 사람의 믿음을 망쳐 놓고 있습니다”(2티모 2,18).
마태 24-25장을 두고 흔히 종말 설교라 부른다. 이 본문은 마태오가 독자적인 경로로 예수님의 말씀을 수집해 쓴 것이 아니라, 이미 마르 13장에 있던 내용을 집필 자료로 사용해 완성한 것이다. 따라서 마르코와 마태오, 두 복음을 비교하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잘 가려내면 마태오의 생각을 알아낼 수 있다.
먼저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마르 13,10).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어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될 터인데, 그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마태 24,14).
<성서와함께>를 매달 읽는 독자분이라면 두 본문의 차이점이 바로 눈에 띌 것이다. 마르코 복음은 복음 선포에 집중하지만, 마태오 복음은 복음 선포와 종말의 관계를 역설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마르 13,10은 문법적으로 ‘데이(~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 + 부정사’ 구문인데 비해, 마태 24,14는 ‘미래형 동사’(케뤽테세타이, 선포될 것입니다)를 사용해 현재 요구되는 복음 전파의 급박함을 강조한 마르코 복음보다 훨씬 여유 있어 보인다. 마태오의 편집 작업으로 종말까지 시간을 좀 번 셈이다. 이를 두고 ‘지연된 종말론’이라 한다.
지연된 종말론에 따라 ‘종말이 오기 전에 서둘러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이제 ‘미래에 닥칠 종말 때까지 주어진 시간 동안에 복음을 선포하라는 과제가 주어졌다’는 현실 인식으로 바뀌게 된다. 사실 마태오가 복음서의 결론으로 제시한 28,16-20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28,19). 그리고 종말에 벌어질 일들을 알려 주는 ‘탈렌트의 비유’(25,14-30)에서도 주인은 여행을 갔다가 “오랜 뒤에”(25,19) 집으로 돌아온다. 즉 현재란 철저히 종말에만 기대어 옴짝달싹 못하는 시간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여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게 하는, 따라서 충분히 존중받아야 할 시간이다.
마태오는 마르코 복음에서 ‘종말이 곧 올 테니 서둘러 준비하라’는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모든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다는 현실 인식도 있었다. 복음을 전달받지 못한 민족에겐 사실 억울한 노릇이기는 하다. 도대체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종말을 맞을 순 없는 일 아닌가. 따라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고 그 사명이 교회에 주어졌다는 사고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마태오가 복음서를 집필하면서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해 현재와 미래, 복음 선포와 종말, 유다인과 이방인 등 다양한 조건들을 고려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처음 복음을 전해 받았던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무엇보다도 궁금했던 것은 예수님은 누구인가였을 테고, 더욱 궁금했던 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신들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였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갖게 되는 의문이다. 사도들이 자꾸 예수님을 믿으라고 독촉하는데 믿으면 무슨 좋은 수가 생길까?
마태오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종말의 날에 심판하시는 주님으로 다시 오시리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예수 재림이라는 신앙 유산을 물려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24,29-31). 그날이 오면,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3,12)이며 우리에게 말씀하시리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25,34).
그런데 곧 오겠다며 승천하신 예수님은 감감무소식이고 시간은 점점 흐르고 있었다. 마태오가 복음서를 완성한 때를 대략 기원후 80-90년으로 본다면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셨던 30년경과 무려 50-60년의 차이가 나는 셈이다. 예수님을 직접 모셨던 제자들은 이미 유명을 달리했고 2세대마저 나이가 들어 혼란의 조짐이 교회 내에 보이고 있었다.
마태오는 공동체가 궤멸할지 모를 위기 상황에서 대안을 제시했다. 마태오의 목소리를 재현해 보자.
“우리를 박해하는 유다인들과 부활 신앙의 무의미함을 강조하는 헬라인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 우리가 목숨을 버려가며 우리의 신앙을 지키려 하는지, 또한 왜 우리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려 하는지.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여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종말의 날에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이것이 시대의 정신이며, 시대가 요구하는 신앙이며, 이것이 시대가 추구해야 할 생생한 미래입니다. 그들의 판단은 틀렸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마지막 힘을 냅시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시오(10,7). 예수님이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28,20).”
* 박태식 신부는 대한성공회 소속으로 월간 <에세이>로 등단, 월간 <춤>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입문했고, 현재 서강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성공회대학교에 출강하며, 대한성공회 장애인 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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