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야고보 서간 (2) 믿음과 실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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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5 | 조회수7,435 | 추천수0 | |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 야고보 서간 (2) 믿음과 실천
성경에 수록된 모든 책은 교회의 가르침으로서 정통성과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내용이 똑같은 비중으로 읽히거나 인용되지 않는다. 이 글을 읽는 독자도 구약성경 46권과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특히 좋아하여 더 자주 읽는 책이 있는가 하면, 덜 펼쳐 보게 되는 책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종파에서도 나타난다. 야고보서는 개신교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 책이었다. 야고보서는 ‘행위’를 강조하는데, 개신교는 ‘믿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반면, 가톨릭교회는 야고보서를 실천적 신앙으로 이끄는 가르침의 중요한 원천으로 여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2,17). 이 구절이 야고보서에 나오는지는 몰랐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이 가르침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이 말씀은 시대를 초월하여, 주일 미사 참례 정도로 신자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길 뿐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알기 전이나 후나 별반 다를 바 없이 살아가면서 안일한 신앙에 안주하려는 태도를 꾸짖고 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처럼, 자신이 믿는 바를 행동으로 입증해야 비로소 그것이 온전한 믿음이라는 야고보의 가르침은 지극히 당연하여 반박의 여지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 구절과 관련하여 개신교와 가톨릭은 오랫동안 입장을 달리해 왔다. 개신교 측에서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갈라 2,16 참조)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지지했지만, 가톨릭교회에서는 믿음은 실천으로써 드러나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해 왔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에 어떻게 이처럼 상반되어 보이는 가르침들이 나란히 자리할 수 있었을까?
야고보의 “실천”과 바오로의 “행위”
야고보 서간의 “실천”과 바오로 서간의 “행위”는 둘 다 같은 그리스어 ‘에르곤(ἔργον)’을 번역한 것이다. 에르곤은 ‘일, 행위, 행동’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진정한 믿음에는 ‘에르곤’이 따라야 한다고 하고, 바오로는 ‘에르곤’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니,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위대한 두 지도자가 전혀 다른 것을 가르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사도의 가르침은 각기 다른 상황의 문제점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었다.
바오로 사도가 선교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는 이방인이 많았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유다인들처럼 되어야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 흔들리곤 했다. 게다가 일부 유다인 선교사들이 이방인들도 자신들처럼 먼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부추기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방인 중에는 자신들의 구원을 할례라는 행위를 통해 보장받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구원은 ‘에르곤’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통해서 온다고 강조한 것이다.
야고보서의 경우는 그것과 다르다. 야고보서의 ‘에르곤’은 할례나 율법 조항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실천하라고 명하신 행동들, 즉 사랑의 실천을 말한다.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해서 애덕 실천의 의무마저 면제받은 것은 아니다. 야고보서는 교리를 알고 이해하는 것에만 안주하지 말고 그것을 행동으로 연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결국 야고보가 강조한 ‘실천’은 율법의 실천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었고, 바오로가 반대한 ‘행위’는 사랑의 실천이라는 행위가 아니라 율법에 기대는 행위였다. 믿음과 실천에 관해 상반된 듯이 보이는 두 가르침이 나란히 정경으로서 보존되어 온 것은 초대 교회의 문제들이 그 시대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 공동체가 역사에서 때로는 가시적 행위로 기울고 때로는 실천적 가치들을 경시하여 입술만의 신앙으로 기울 때마다, 그 시대의 오류에 따른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런 성경 말씀을 나란히 둔 것은 하느님의 섭리였을 것이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험난한 세상살이에 부닥치며 살다 보니 처음엔 여리디여렸던 양심의 결이 어느덧 무디어진 탓일까? 오늘날 우리는 남을 크게 속여 교도소에 갈 정도의 일이 아니면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에 대해 심각히 여기지도 않을 만큼 둔감한 양심의 소유자가 되어 있지 않나 싶다. 야고보서는 구체적인 말과 행동으로 속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는 것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가르친다(1,22 참조). 아는 것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 것을 부끄러이 여겨 행동하지 않을 수 없는 양심이라면, 그 양심은 얼마나 맑고 민감해야 할까!
“죽는 날까지 …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독립운동가이기 이전에 신앙인이었던 윤동주 시인의 <서시> 한 구절이 아직은 시린 3월의 바람처럼 다가온다.
* 강은희 님은 미국 The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수학하였으며(성서학 박사),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와 동 대학교 신학원에서 성경 전반에 걸쳐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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