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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베드로의 첫째 서간 (6)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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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7,822 추천수0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 베드로의 첫째 서간 (6) 종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신앙인들의 첫 걸음마부터 영적 젖을 먹여 가며 한 걸음씩 인도해 온 베드로의 가르침은 이제 종말로 향한다. ‘종말’이란 개념은 두려움과 정서적인 혼란을 동반한다. 실제로 역사에서 종말과 관련해 극단적인 혼란이 야기됐던 경우를 우리는 수차례 보아 왔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베드로의 첫째 서간 4장은 언제 올지 모르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을 종말을 향해 사는 우리가 평정을 유지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품위를 완성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주옥같은 구절로 가득하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4,8)

 

종말이란 말 앞에서 인간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종말이 반드시 온다는 것 외에 그 어떤 구체적 정보도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는 이들에게, 베드로는 그 ‘해야’ 할 바는 행동이 아니라 내적 결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고난을 겪으셨던 그리스도와 “같은 각오로 무장하십시오”(4,1). 종말을 바라보는 인간에게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준비는 그리스도께서 지향하셨던 그곳을 향해 꿋꿋이 나아갈 다짐을 새로이 하는 것, 한마디로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의 무장을 하고서 어떤 실천적 행위를 해야 할 것인가? 오직 사랑이다. 종말의 혼란 속에서 오히려 더 필요한 것이 사랑이다. 왜냐면 사랑은 많은 허물을 덮어 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허물 없는 사람이 있을까? 완전무결하신 그분 앞에 합당한 순수함으로 나아갈 유일한 길은 자신의 지나온 모든 허물을 사랑으로 씻어 가며 나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로서”(4,10)

 

사랑의 실천은 현실에서 곧바로 장애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다. 왜냐면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같지 않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저마다의 다양한 은사로 서로 봉사하라고 가르친다. 은사가 다양하다는 것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은사는 서로 봉사하기 위해, 서로에게 없는 부분을 채워 주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베드로는 우리 각자가 은사의 관리자임도 깨우쳐 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 나라의 자원 관리인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관리를 통제와 혼동하지는 않았을까? 사실, 나 자신을 포함해 내 주변의 모든 것은 내가 받은 은사이며 나는 그것을 돌볼 책임이 있다. 나와 내 주변의 모든 피조물이 좀 더 나은 자신의 모습을 갖추도록 돕고, 그들이 있어야 할 장소에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은총의 관리자로서 해야 할 도리이다.

 

 

고난을 겪으면 놀라지 말고, 부끄러워 말고(4,12.16)

 

인생이라는 세파를 헤쳐 나가다 보면 소위 ‘고난’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베드로는 그 고난을 구별한다. 우리의 어리석음 또는 잘못으로 고난을 겪는 것과 그리스도와 같은 정신으로 살기에 그리스도와 같은 고난을 겪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세상의 눈으로 보자면 그 둘이 구별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수님의 죽음 역시 믿지 않는 이들의 눈에는 죄인으로 처형된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보였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겪는 수난이 인간적 측면으로는 수치스러울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겨내라고 격려한다.

 

고난에 대한 베드로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며 겪는 어려움을 어떠한 태도로 받아들이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그분의 뜻에 따라 살면 당연히 축복이 따라야 한다고만 여기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중에 고난이나 오해, 비웃음을 겪게 되면 의아해하거나 분개하고, 심지어 하느님의 정의를 의심하기까지 한 적은 없었던가? 그런데 베드로는 바로 그것이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을 깨달아 생명의 길로 들어선 것처럼, 우리가 올바른 일을 하는 중에 겪는 어려움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더 많은 이를 생명의 길로 초대하고 계실 것이다. 그것을 깨달을 때에만 그분을 향한 진정한 찬미가 우러나올 것이다. 비록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모욕으로 짓눌려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이기에, ‘마지막’에 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의 궁극은 ‘종말’이다. 종말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단지 새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라면 종말은 의미가 없다. 종말의 진정한 의미는 인간적 탐욕과 힘의 원리가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이 통치하는 세상이 오는 것이기에 가치 있고 기다려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세상 모든 이가 서로 사랑한다면 그 순간이 이미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순간에 도달하려면 현실적으로는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멀다. 따라서 이 세상 모든 이들까지는 아닐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사랑의 삶을 산다면, 그 자체로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웃들에게 미리 종말을 보여 주는 값진 증거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진정한 종말의 순간이 왔을 때, 그리스도와 같은 정신으로 살아온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순간 성부께 드렸던 것과 같은 말로 하느님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께 맡겨 드립니다.’”(루카 23,46; 참조 1베드 4,19)

 

* 강은희 님은 미국 The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수학하였으며(성서학 박사),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와 동 대학교 신학원에서 성경 전반에 걸쳐 강의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1월호(통권 490호), 강은희 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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