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유다 서간 (2)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십시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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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5 | 조회수7,813 | 추천수1 | |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 유다 서간 (2)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십시오
유다 서간의 저자는 하느님을 향해 흔들림 없이 올곧게 나아가야 할 공동체를 방해하는 이들을 경계하였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들의 그릇된 행위를 지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이들의 행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애찬’이라는 말은 유다서에만 나오는 말이며, 문맥으로 보면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는 자리다. 음식을 먹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행위이다. 그 먹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자연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함께 모여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함께 영위하는 행위다.
애찬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유다 서간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인 이들이 음식을 나누는 것을 ‘애찬’(그리스어 ‘아가페’)이라 부름으로써, 이 음식 나눔이 사랑의 행위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 애찬에 참여하면서도 애찬을 애찬이 아니게끔 더럽히는 이들이 있었다. 애찬을 더럽히는 행위는 무엇일까? “잔치를 벌이면서 자신만 돌보는”(12절) 것이다. ‘잔치’란 여러 사람을 불러서 함께 음식을 즐기는 모임이다. ‘잔치를 벌이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쉰유오케오마이’이다. 여기서 ‘쉰’은 접두어로 ‘함께’라는 의미이다. 잔치의 본질은 ‘함께’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이 함께하는 자리에서 자신만을 돌본다는 것은 잔치를 잔치가 아니게 만드는 행위다. 유다 서간의 저자는 그렇게 애찬을 더럽히는 이들을 떠돌이별에 비유하며 강한 어조로 꾸짖는다.
‘떠돌이별’이란 고대 사회에서 부정적인 말이었다. 고대 사람들은 일정하게 자리를 지키지 않아, 항해하는 배를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하는 떠돌이별을 불길한 것으로 여겼고, 이들을 타락한 천사들과 연관시켰다. 이들 타락한 천사들과 떠돌이별의 운명은 동일하며(6절, 13절), 애찬을 더럽히는 이들 역시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조롱꾼들을 경계하십시오
유다 서간의 저자는 마지막 경고로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고한 것을 상기시킨다. “마지막 때에 자기의 불경한 욕망에 따라 사는 조롱꾼들이 나타날 것이다”(18절). 그리스어로 ‘조롱하다’는 ‘엠파이조’이며, 이와 연관된 단어는 신약성경에 십여 차례 등장한다. 그중 루카 14,29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님의 수난을 조롱하거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을 조롱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유다 서간의 저자는 이 조롱꾼들을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로서, 현세적 인간이며 성령을 지니지 못한 자들”(19절)이라고 특징짓는다. 그리스도와 그분을 따르는 이들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방해하며 공동체 안에서 분열을 일으킬 것이다. 또한,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을 업신여기는 이유는 그들의 가치관과 그리스도의 가치관이 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가치 있다고 가르치신 것이 왜 그들의 눈에는 우습게 보이는 것일까?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향하는 곳은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현세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이들의 눈에는 어리석은 치욕일 뿐이다. 손해 보는 삶임을 알면서도 어떻게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이 세상에 희망을 두지 않고, 하늘 나라의 가치에 희망을 둘 때 가능하다. 결국 현세적 인간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갈 수 없다. 그런데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세상을 초월하는 가치를 마음에 두고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은 성령으로부터 온다. 성령 안에서 하늘나라의 가치를 마음에 두고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려는 이들이 경계해야 할 대상은 성령을 지니지 못한 채 현세적인 것들에 얽매여 있는 이들,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그분으로부터 떼어 놓으려는 이들, 조롱꾼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아가십시오
주변의 방해가 있어도, 우리는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로서 계속 성장해 나가야 한다. 그 성장에는 기도와 자비가 맞물려 있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현실적인 것들에 막혀 제대로 볼 수 없는 눈을 열어 주어, 올바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 준다. 그곳을 바라보며 주님의 사랑과 자비에 우리 자신을 맡겨드리는 것이다. 또한 유다 서간은 주님의 자비를 기다리는 이들답게 우리의 자비가 필요한 이들에게 우리도 자비를 베풀라고 가르친다. 의심하는 이들의 나약한 믿음을 이해하고 자비로 감싸 주고, 이미 악에 빠진 이들도 구할 수 있다면 그 불길에서 구해 내라고 한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죄는 철저히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악에 빠진 이들의 속옷까지도 미워할지언정,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풀라고 한다(23절).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성장하는 길이다.
그리스도의 조롱꾼들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시절에만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다양한 방식으로 조롱에 노출되어 있다. 때로는 폭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그러한 도전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우리 믿음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유다 서간의 짧지만 강한 가르침을 되새기며, 정죄보다는 의연함과 자비로써 조롱을 감싸 안는 지혜를 배워 나가야 할 것이다.
* 강은희 님은 미국 The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수학하였으며(성서학 박사),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와 동 대학교 신학원에서 성경 전반에 걸쳐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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