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창세기 인물 열전: 아브라함의 아들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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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5 | 조회수15,331 | 추천수0 | |
[창세기 인물 열전] 아브라함의 아들들
바벨탑 사건 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어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17,4)로 삼으셨다. 이 운명에 걸맞게 아브라함은 아들을 여럿 두었다. 첫째는 여종 하가르에게서 얻은 이스마엘, 둘째는 사라에게서 얻은 이사악이다. 사라가 죽은 뒤에는 후처 크투라가 지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를 낳았다. 이 중 이스마엘은 아랍인의 조상이, 이사악은 야곱을 거쳐 히브리인(유다인의 뿌리)의 조상이 되니, 아브라함은 그리스도교까지 합쳐 하느님을 섬기는 삼대 유일신교의 성조인 셈이다.
이스마엘
첫아들 이스마엘은 서출이다. 오랫동안 아이가 없던 사라를 대신해 여종이 낳았다. 이는 정실부인이 자식을 낳지 못하면 첩을 들이던 우리의 옛 풍습을 떠올리게 한다. 다만 사라는 자원해서 여종을 남편에게 주었다(16,2). 성경 시대 여인들은 그런 방법을 써서라도 불임의 수치를 없애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하가르는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고서 사라를 업신여긴다. 사라는 그것이 아브라함의 불찰이라며 그를 탓한다(16,4-5).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종의 소유권이 남편에게 넘어갔으니 하가르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주인은 아브라함이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가르 소유권을 사라에게 되돌려 주어 사라의 불만을 해소한다. 아브라함 시대에 집성된 함무라비 법전이 이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여종이 아이를 낳아 오만해져서 불임인 본부인과 동등한 위상을 주장할 경우, 그 신분을 종으로 낮추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146항). 도로 사라의 종이 된 하가르는 혹독한 대우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지만, 광야에서 헤매다 천사를 만난 다음 여주인에게 되돌아간다(16,7-9). 그 뒤 아들을 낳고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했다. 이는 ‘하느님이 들으시다’라는 뜻인데, 고통에 찬 자신의 소리를 주님이 광야에서 들으셨기 때문이다. 천사는 훗날 이스마엘이 큰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고 알려 준다(21,18).
이사악
이스마엘이 태어나고 십이 년 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얻는다. 이사악은 ‘웃다’라는 뜻이다. 세 천사가 아브라함 내외를 찾아와 수태를 전하자, 늙은 자기가 어떻게 아기를 갖느냐며 사라가 웃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18,12). 그렇지만 이 이름은 하느님이 이미 점지해 두신 것이기도 했다(17,19). 따라서 이사악의 출생으로 웃게 되는 주인공은 사라가 아니라 하느님일 수도 있다. 사라의 웃음은 의심에서 나왔지만, 하느님의 웃음은 사라처럼 믿음이 부족한 인간의 한계를 꼬집는 웃음이다(시편 2,4). 사라의 웃음은 득남한 후 환희로 바뀐다(21,6).
두 민족의 조상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계약을 이어받은 아들은 이사악이지만,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도 동등한 아들로 여긴 것 같다. 이사악을 낳은 사라가 이스마엘을 쫓아내려 하자, 아브라함이 몹시 언짢아 했다(21,11)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이스마엘이 이사악과 동등한 상속권을 가졌다는 사실은 이스마엘이 성장하기 전에 집에서 쫓아내고 싶어 했던 사라의 행동에서도 암시된다(21,10). 이스마엘이 이사악의 상속에 위협이 되지 않았다면, 사라는 제가 요청해 낳은 이스마엘을 쫓아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함무라비 법전에 따르면, 종의 자식도 정실의 자식과 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170-171항). 남편이 그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려면, 종과 그의 소생을 자유인으로 풀어 주어야 했다. 사라가 의도한 것도, 이스마엘이 상속받지 않는 대신 하가르와 함께 자유인으로 풀려나는 것이었다. 유다 전승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아브라함이 너무 오냐오냐한 탓에 이스마엘이 버릇없는 아이로 자랐고, 여인들을 함부로 대하고 우상을 섬기며 이사악까지 죽이려는 것을 사라가 꿰뚫어 보고 내쫓았다고 한다(창세기 라바 53,11). 공정한 전승은 아니지만, 유다인들이 이사악의 후손이기에 이런 편견도 생길 수 있었던 것 같다.
집을 나온 이스마엘은 활잡이로 성장했으며(21,20), 전승에 따르면 아랍인의 조상이 되었다. 이 전승이 맞는다면, 그는 성경 예언처럼 진실로 큰 민족의 아버지가 된 셈이다. 실제로 아랍 무슬림은 이사악이나 사라보다 이스마엘과 하가르를 더 높이 평가한다. 이사악 번제 사건(22장)도 이스마엘 번제 사건으로 바꾸어 전한다. 이슬람 축제인 ‘이드 알 아드하’(Eid al-Adha, 희생제)가 바로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대신 번제 양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축제다. 반면, 이스라엘 민족은 이사악과 야곱을 통해 이어지므로, 어찌 보면 유다인들은 아랍인들과 사촌 관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형제 갈등으로 멀어진 두 민족이, 지금은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 팔레스타인이라는 한 지역에서 이웃으로 살고 있다. 다만 사촌이라는 혈연이 무색하게 서로 땅을 독차지하려고 분쟁하고 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 모습을 하늘에서 본다면, 어느 쪽에 손을 들어 줄까?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져 온 세상에 유일신 사상을 심었지만, 가지가 많아 바람 잘 날 없는 나무처럼 그들 사이에서 번민하고 있지는 않을지?
* 김명숙 님은 예루살렘의 히브리대에서 구약학 석사 ·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예루살렘의 홀리랜드대와 가톨릭대 문화영성대학원과 수도자 신학원에서 구약학 강의를 하였고,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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