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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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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6 조회수8,927 추천수0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세상에 좋은 것들을 보여 주며 산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인은 스승에게서 전해들은 윤리적 가르침을 세상을 향해 선포할 때 큰 자부심을 느낀다. 원수에 대한 사랑과 박해하고 상처를 입히는 이들에 대한 용서를 말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참된 정의와 평화와 형제애를 말하고 그것을 위해 애쓰는 신자들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진짜 소명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세상에 전하면서 부활의 증인이 되는데 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진실로 믿으며 희망하는 사람이고, 인간적 논리로는 도대체 설명할 수도 입증할 수도 없는 하나의 선언, 곧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성경 말씀을 받아들이고 증언하는 사람이다.

 

 

부활에 대한 성경의 증언은 인간적 논리로 볼 때 허점이 많아 보인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어떻게 믿고 받아들일까? 이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께서 다시 살리신 이들(라자로 등)처럼 이승의 평범한 인간 생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통해 전혀 다른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셨다. 제자들이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건이었다. 제자들은 새로운 현실에 적응해야 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이 제자들에게 처음부터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듯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도 그와 비슷하게 이루어졌다.1)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성경의 증언은 인간적 논리로 볼 때 허점이 많아 보인다. 부활에 대한 증언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하나는 ‘고백 전통’으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는 내용(루카 24,34; 로마 10,9; 1코린 15,3-8 참조)이고, 다른 하나는 ‘설화 전통’으로 예수님의 발현 사실을 이야기로 전하는 내용이다(마태 28,1-20; 마르 16,9-20; 루카 24,1-49; 요한 21,1-19 참조).2)

 

그러나 복음사가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기술하지는 않는다. 부활은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하느님의 신비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저항할 수 없는 어떤 현실을 체험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신 후에도 살아 계시어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그분은 통상적 방법으로 만질 수 있는 이 세상에 더는 속하지 않으시면서 우리가 당신을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내주셨다는 사실을 전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부활 증언은 인간적이고 과학적인 논리로는 모순되어 보이지만, 오히려 신비로운 부활의 세계를 말하고 있다.3)

 

부활 사건에 접근하는 논리는 무엇이어야 할까? 성경이 전하는 이야기에서 부활을 목격하거나 전해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제자들의 움직임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서둘러 길을 간다. 왜 그들은 뛰어갔을까? 무엇이 그들을 가슴 벅차도록 뛰게 했을까? 마리아 막달레나가 본 것은 빈무덤이었는데, 무엇이 그를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게 했을까?(마태 28,8; 요한 20,2 참조) 무엇이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를 한 걸음에 무덤으로 달려가게 했을까?(요한 20,4 참조) 무엇이 그로 하여금 보고 즉시 믿게 만들었을까?(요한 20,8 참조) 무엇이 베드로를 물속으로 이끌어 호숫가에 계신 예수님께 헤엄쳐 가게 했을까?(요한 21,7 참조)

 

믿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다. 그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는 과정을 이성으로 다 설명할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들이 모두 주님을 사랑했다는 사실이다. 사랑이 그들 마음의 눈을 뜨게 했다. 부활의 기쁨은 지상에서 그분께 충실한 사랑을 지녔던 이들에게 돌아갔다. 부활은 분명 사랑 체험과 연관되어 있다.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깊이 체험하는가에 따라 부활은 다르게 다가온다

 

부활 팔일 축제 중에 베드로와 예수님의 눈부신 만남을 보게 된다(요한 21,1-19 참조). 베드로와 그의 스승 사이에 친밀한 우정과 사랑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흔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시니 베드로가 사랑한다고 세 번 대답한 이야기가 새로울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배반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세 번이나 그에게 다짐을 받는다는 해석이다. 물론 이 해석은 틀리지 않다. 그렇지만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더 들어가 보아야 한다.

 

그리스어 성경은 이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 뜻이 조금 다른 세 단어를 선택했다. 당시 그리스어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는 셋으로 구별되었다. 첫째는 ‘에로스’이다. 이는 끌리는 사랑, 감정에 기반을 둔 사랑이고, 육체적 사랑이다(남녀의 사랑이 이를 잘 표현한다). 둘째는 에로스보다 더 포괄적인 ‘필로스’이다. 정신적으로 더 성숙한 사랑, 우정이나 친밀감으로 표현되는 사랑이다. 우리는 살면서 이 사랑을 분명히 경험한다. 부부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 친구 사이에서 느끼는 친밀한 사랑이다. 셋째는 ‘아가페’이다. 비교할 수 없이 큰 사랑, 지고의 사랑, 이상적 사랑이다.

 

복음서의 순서를 보면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늦게 만난다. 물론 베드로도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요한 복음사가에 따르면 베드로는 가장 늦게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난다. 처음에는 여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께 돌아서서 신앙을 고백한다(‘동산지기’에서 ‘라뿌니’로: 요한 20,16 참조).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루카 24,13-35 참조). 또 토마스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깊은 체험을 한다(요한 20,24-29 참조). 그는 예수님과 대화하며 주님께 신앙을 고백한다(“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왜 복음사가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만남을 가장 늦게 기록했을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 전날 밤,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26,33; 참조 마르 14,29)라고 고백했던 사람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의 사랑은 틀림없이 큰 사랑, 지고한 사랑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을 배반한 일에 무척 실망하고 괴로워했을 것이다. 이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그들보다(곧 다른 열한 제자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Simōn Iōhannu agapās me pleon tutōn, 지고한 사랑 아가페)고 물으신 점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이는 베드로를 나무라는 말씀이 아니다. 베드로는 대답한다. “주님, 당신께서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십니다”(kurie, syu oidas hoti philōse, 친밀한 사랑 필로스). 그렇지만 그의 대답은 두 가지가 어긋나 있다. 우선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지고한 사랑(아가페)이 아니다. 그는 다른 모든 이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고 대답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 사건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깨달았고, 그래서 몹시 절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대답은 이런 것이다. “주님, 제가 주님을 큰 사랑으로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을 당신이 아십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다른 모든 제자보다 더 당신을 사랑한다고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큰 사랑(아가페)을 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직무를 베드로에게 주시는 데 망설이지 않으신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 그에게 교회를 맡기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신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Simōn Iōhannu agapās me) 두 번째 질문에는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가 없다. 이 말씀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다른 이들과 너를 비교하면서 괴로워하지 마라’는 뜻이다. 이때 사용된 사랑 역시 아가페이다.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6). 베드로는 첫 번째 대답과 똑같이 대답한다. 베드로는 아직 자신의 모멸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과거의 자신에 머물러 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6).

 

이 말씀에 사용된 그리스어는 첫 번째 말씀과 비교하여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주님께서는 처음에 “내 어린양들”이라고 하셨는데, 이번에는 “내 양들”이라고 하신다. “내 양들”을 직역하면 “내 어미 양들(ta probata mu)”이다. 어린양들이 교회의 모든 백성이라면, 어미 양들은 양들을 돌보는 수장이다. 이는 ‘너는 열둘 중에 여전히 첫째이며 교회의 수장들을 모두 네가 돌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베드로의 배신과 절망에도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그를 신뢰하며 더 큰 사랑으로 감싸 주신다는 의미이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물으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Simōn Iōhannu phileis me) 이때 사용된 동사는 베드로가 두 번이나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사용한 그 동사이다(필로스). 그렇지만 베드로는 이 말씀을 반기지 않고 오히려 더 고개를 숙이며 절망한다. 그러면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고 대답한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 (어미)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7). 이는 베드로를 일으켜 세우는 말씀이다.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정말로 사랑한다. 네가 지고한 사랑, 큰 사랑으로 나를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나는 괜찮다. 다만 나는 너를 정말로 사랑한다. 그러니 용기를 내어라. 그리고 교회를 위해 너의 사랑을 마음껏 펼쳐 다오.” 베드로가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 주님을 위한 사람으로 변화된다. 우리 주님은 이런 분이시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가? 주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경험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도 믿지 못한다. 비록 우리가 나약한 자신을 믿을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를 향한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믿지 못해서는 안 된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이야기는 오늘도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에서 늘 일어난다.

 

부활의 아침이 밝았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다만 주님을 더 사랑하려고 노력하면 좋겠다.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면 좋겠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깊이 체험하고 사는가에 따라 부활은 각자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이번 부활 시기가 주님과 함께 다시 일어서는 은총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1) 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2》, 바오로딸, 2012년, 306쪽.

2) 베네딕토 16세, 같은 책, 311-338쪽.

3) 베네딕토 16세, 같은 책, 307쪽.

 

* 정용진 신부는 1997년에 로마 우르바노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제품을 받았다. 2000년부터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성서신학을 공부하였고, 2007년에 귀국하여 현재 청주교구 성서사도직을 맡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4월호(통권 445호), 정용진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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