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예수님 이야기66: 예수님과 자캐오(루카 19,1-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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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6 | 조회수10,767 | 추천수0 | |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66) 예수님과 자캐오(루카 19,1-10) 지성이면 감천이라… 간절함으로 구원받은 자캐오
- 예리코에 있는 돌무화과나무. 자캐오가 올라간 나무라고 전해지지만 실제 나이는 700살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
예리코에서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만나시는 이 일화는 루카복음서에 볼 수 있는 대표적인 회심 사건입니다. 그 과정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돈 많은 세관장이 있었는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보려고 했지만, 키가 작은 탓에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앞질러 달려가서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거기에서 그 아래를 지나가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습니다.(19,1-4)
우선 자캐오에 대해 알아봅시다. ‘자캐오’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자카이’를 그리스말로 발음한 대로 표기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깨끗한, 결백한’이란 뜻입니다. 그는 국경 도시 예리코의 돈 많은 세관장입니다. 유다인들은 세리들을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삼은 로마제국을 위해 세금을 거둬들일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착복하고 횡령하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세리를 죄인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 자캐오는 유다인이면서도 세관장이었을 뿐 아니라 돈까지 많았습니다. 경건한 유다인들에게는 죄인으로서 배척의 대상이었음이 당연합니다.
그런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합니다. 아마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루카 7,34)라는 소리도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키가 작아 사람들에게 가려서 볼 수가 없자 앞질러 달려가서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세관장이라면 그래도 기관장입니다. 기관장이 달려가서 나무 위로 오른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엄두를 내지 못할 일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보려는 열망이 컸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나무 아래에 이르러 자캐오를 쳐다보시면서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친근함의 표시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이름을 부르면서 친근함을 표시하시고는 그의 집에서 하루를 묵겠다고 하십니다. 그것도 “오늘” 말입니다. 자캐오로서는 놀라움이자 더할 수 없는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얼른 내려와서 기쁘게 예수님을 집에 모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보고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 하고 투덜거리지요.(19,5-7)
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자캐오가 일어나서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19,8) 자캐오는 부자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부자라 하더라도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아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네 곱절로 갚아주는 경우는 양을 도둑질했을 때입니다.(탈출 21,37) 남을 속여서 또는 착취해서 부당하게 이익을 챙겼을 때는 그 액수에다 그 액수의 5분의 1을 더한 액수로 되갚아 주어야 했습니다.(레위 5,21.24) 그렇다면 자캐오는 아주 파격적인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19,9) 경건한 유다인들이 볼 때 자캐오는 죄인임이 분명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구원받았다고 선포하십니다.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는 말씀은 단지 자캐오만이 아니라 자캐오의 가족 모두가 구원받았음을 알게 해줍니다. 말하자면 한 사람의 회심이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 집안 전체에 구원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9,10)는 마지막 말씀은 자캐오 이야기의 결론일 뿐 아니라 소외된 이, 가난한 이, 이방인, 죄인들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는 루카복음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캐오 이야기는 15장에 나오는 되찾은 양의 비유(15,3-7), 되찾은 은전의 비유(15,8-10), 되찾은 아들의 비유(15,11-32)를 뒷받침하는 실제 사례로서 역할을 합니다.
생각해봅시다
예수님과 자캐오의 이야기는 만남과 구원에 대해 좀더 생각할 여지를 남겨 줍니다. 구원은 주님이신 하느님과 인간과의 만남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만남이 이루어지려면 인간 편에서의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를 만나러 오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의 귀를 닫고 영혼의 눈을 감고 있다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볼 수가 없고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자캐오에게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 간절한 열망에서 자캐오는 창피를 무릅쓰고 앞질러 달려가서 나무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을 만날 수 있었고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변화되었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지만(루카 18,25), 부자인 데다 죄인으로 멸시받던 자캐오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자캐오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하느님께는 가능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눈을 뜨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간절함을 담고서 말입니다. 그 간절함의 기도는 이런 기도일 것입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아니면 제가 바뀌도록 해주십시오.’
- 예리코에 있는 앨리사의 샘.
알아보기
예리코 : ‘종려나무 도시’라는 뜻을 지닌 예리코는 기원전 9000년쯤 형성된 지구 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구약성경에서 70번이나 언급되는 예리코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36㎞ 떨어진 오아시스 도시이기도 합니다. 예리코는 예수님 시대 이전부터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목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00m의 고지에 위치하지만 예리코는 해수면에서 250m나 낮아서 두 도시의 고도 차이가 거의 1000m에 이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루카 10,30)라고 표현하시는데,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예리코는 레위인들과 사제들이 주로 살고 있어서 사제들의 도시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무렵 이스라엘 땅 전체를 다스린 헤로데 대왕은 이곳에 화려한 궁전을 짓고 겨울이면 예루살렘에서 이곳으로 내려와 지냈습니다. ‘겨울 궁전’이라고불렀는데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지요.
예리코는 오늘날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고 팔레스타인 관할 지역입니다. 시내에는 자캐오가 올라갔다고 하는 돌무화과나무가 있습니다만, 이 나무의 실제 나이는 700살 정도라고 하지요.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만나시고 또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이를 고쳐주신 곳이 예리코인 데다 근처에는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신 유혹 산도 있어서 이스라엘을 찾는 순례객이 빠지지 않고 순례하는 도시이기도 하지요. 구약의 엘리사 예언자가 소금을 뿌려 물의 수질을 좋게 했다는 ‘엘리사의 샘’ 또한 볼 수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6월 3일, 이창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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