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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하느님 나라의 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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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18 조회수8,979 추천수0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하느님 나라의 생물학(Die Biologie des Reiches Gottes)

 

 

하느님 나라의 생물학이라는 제목이 혼란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생물학이라니, 무슨 뜻이야? 하느님의 다스림과 생물학이 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에서 농사일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는 점을 떠올리면, 그런 혼란은 금세 사라집니다.

 

예를 들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르 4,3-9),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마르 4,26-29), 무화과나무의 비유(마르 13,28-29), 밀과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 겨자씨의 비유(루카 13,18-19),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 이야기(요한 12,24),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요한 15,1-8),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루카 13,6-9) 등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한국 땅에 태어나셨더라면, 벼를 재배하는 일과 관련된 비유도 분명 말씀하셨을 테지요.

 

 

밀밭과 포도밭

 

예수님의 그 모든 비유에서 저마다 핵심적인 의미를 띠는 부분은 생물학적 과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다만 세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첫 번째 예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갑니다. 그가 씨를 뿌리는 밭은 가시덤불이 많습니다.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는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빛과 공기를 차단해 숨을 막아버립니다. 또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집니다. 밭은 척박하고, 곳곳이 흙이 깊지 않은 메마른 땅입니다. 조금만 파도 석회암 돌밭입니다. 가련한 농부! 그의 힘겨운 수고가 모두 헛되고 말았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씨를 뿌린 밭이 풍성한 결실을 냅니다. 그 밭 여기저기에 좋은 땅이 있었던 것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 하나에서 여러 줄기가 돋아납니다. 씨앗 하나가 줄기 하나만을 내는 것이 아니라, 땅 밑에서 첫 줄기가 올라오면서 여러 갈래로 갈라집니다. 곁줄기가 돋아나면서 각 씨앗마다 여러 줄기로 이루어진 한 포기 묶음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생물학적 용어로 하자면, 씨앗이 ‘분화’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한 알의 씨앗이 저마다 30배 또는 60배 또는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마르 4,8 참조). 

 

예수님의 눈은 정확합니다. 그분은 씨앗이 어떻게 자라나는지 잘 아십니다. 씨앗이 열매를 내기까지 ‘분화’라는 현상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그분은 정확하게 간파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 예로, 예수님은 또한 알맞은 거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잘 아십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포도밭 주인이 포도나무와 가지들을 살피러 옵니다. 팔레스티나의 포도밭에는 대개 사이사이에 과일나무를 심었습니다. 오늘날처럼 포도가지들을 위로 묶어 둔 게 아니라, 가지들이 자라면서 바닥으로 뻗거나 나무를 타고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포도밭 주인은 모든 것을 세심하게 살핍니다. 그러다가 삼 년째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발견합니다. 그는 자신의 종(포도 재배인)에게 그 나무를 베어버리라고 말합니다. 아무 쓸모없이 땅에서 영양분만 축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종이 그에게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8-9) 

 

 

채소밭

 

세 번째 예는 채소밭에 대해서입니다. 채소밭은 밀밭이나 포도밭과 달리 집 울타리 가까이 있었지요. 이야기의 발단은 어쩌면 제자들의 걱정과 불신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런 하소연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적이 너무 많습니다. 무관심한 사람들의 수는 많고 우리를 실제로 따르는 이들의 수는 놀라우리만치 적습니다. 이 모든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주님이 매번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 있나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겨자씨를 보여주십니다. 손에 든 겨자씨는 엄지와 검지 사이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지경입니다. 바늘구멍보다 크기가 작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루카 13,19)  

 

겐네사렛 호숫가에는 흑겨자(Brassica nigra)의 일종인 다년생 겨자나무들이 4미터 높이까지 자랍니다. 예수님께서 이 성장의 기적을 자주 마음속 깊이 새기셨음이 틀림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길 수 있을까요? 시작은 그처럼 미약하지만 마지막은 창대한! 단순한 나무가 예수님에게는 상징과 원형이 됩니다. 겨자씨는 자라나서 ‘세상의 나무’가 되고, 그 가지들에는 하늘의 새들이 깃들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에게서 생물학적 과정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비유가 됩니다. 

 

이 세 번째 예에 좀 더 머물러보겠습니다. 예수님 주위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지니신 사명에 비하면 우스울 만큼 적은 수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 이런 말씀도 하시지요.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12,32) 

 

하지만 예수님 사후 몇 십 년도 지나지 않아 지중해 주위 곳곳에 제자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교회를 오랫동안 무시하고 박해했던 로마 황제조차도 승인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교회 공동체들이 널리 확산됩니다. 로마 제국을 다시 한 번 결속시키기 위해 황제가 교회의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에까지 이릅니다. 

 

우리의 걱정도 당시 제자들의 걱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디 있는지 잘 보이지 않고, 세계 곳곳 전쟁의 화마가 휩쓰는 지역은 날로 증가합니다. 무기는 더욱 위협적이 되고, 독재자들은 더욱 교묘해집니다. 대중매체의 속임수와 소유욕과 이기주의가 계속 증대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속수무책인 듯 보입니다. 수많은 나라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고 있고, 그들은 자주 용기를 잃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타협하거나, 위협 앞에서 체념합니다. 

 

그러니 겨자씨의 비유는 바로 우리를 위한 비유이기도 합니다. 어떤 씨앗보다도 작은 겨자씨가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는 커다란 나무로 자라납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저마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께서 마련하시는 토양 속에 자신을 심는 곳, 바로 그곳에 시작은 아주 작지만 하느님의 새 세상이 이루어진다.” 

 

 

하느님 나라의 재료

 

예수님이 당신의 비유들에서 농사일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파악하고 계신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분은 생물학적 법칙성에 대해 잘 아시고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십니다. 그러니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생물학과 관련된 주제를 좀 더 다루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땅속에는 여러 자양분들이 있습니다. 수분과 온기, 부드러운 흙도 존재합니다. 그 속으로 씨앗이 떨어집니다. 그러면 그저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씨앗에 싹이 트고 줄기가 돋아납니다. 모든 것은 씨앗의 엷은 막을 통해 흙 속의 화학적 성분들이 흡수됨으로써 발생합니다. 생물학에서는 이를 삼투작용이라 부릅니다. 씨앗의 세포들 속 유전자들이 씨앗 주위에 존재하는 수많은 성분들을 한데 모으는 촉발 작용의 주인공입니다. 그리하여 이전에 없던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고, 그 덕분에 줄기가 자라나고 이삭이 패고 마침내 낟알이 맺힙니다.  

 

하느님 나라가 바로 그와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전혀 엉뚱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역사와 분리되어 지금까지 있었던 것에서 떨어져 나가는 무엇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 나라는 세상에서 자양분을 얻고 우리의 삶에서 영양분을 흡수합니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다시 배치하고 새롭게 연결하여 변화시킵니다. 여기서 우리 안에 있고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목표로 하는 것은 하느님입니다. 모든 것이 옛것이고, 재료도 옛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새것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역사의 의미요 척도가 되실 때, 바로 거기 하느님의 다스림이 실현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생물학’에도 그 고유한 기본 구조와 법칙성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법칙성에는 우리가 수많은 것들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포함됩니다. 은유적으로 말해, 땅을 갈아엎거나, 비료를 주거나, 씨앗을 뿌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장의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회개하고, 신앙의 모험을 감행하고,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가 되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물론 이 말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오해를 피하려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반절은 우리가 하고, 다른 반절은 하느님께서 이루신다. 씨 뿌리는 수고는 우리가 하고, 나머지는 모두 하느님 소관이다. 우리의 한계가 도달하는 지점에서 하느님이 뛰어드시어 그 이후를 처리하신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생물학은 그런 게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은 그저 나머지를 처리하시는 분, 구멍을 메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실제로 모든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교회의 상황이 좋지 않고 계속 오염될 때, 하느님께서 뛰어드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대로 두면, 교회는 점점 더러워지고 역겨움을 유발하게 될 것입니다. 성당 마이크가 고장 났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지는 않으십니다. 그대로 두면, 노인들은 강론을 잘 알아듣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가 연습을 게을리하거나 마음을 다해 성가를 부르지 않아 노랫소리가 엉망이 된다고 해서 천사들의 천상합창대가 대신해서 노래를 부르지는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우리 자신이 스스로 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께서도 모든 것을 하십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께서 주지 않으셨다면, ‘교회를 향한 사랑’은 한 줌조차도 불가능합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지 않으셨다면, 형제 사랑은 한순간조차도 불가능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성장하는 곳, 바로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업적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 인간의 업적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처럼,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온전히 하느님께서, 온전히 인간이! 혼합도 분리도 없이!” 

 

하지만 어떻게 동일한 하나의 일이 동시에 온전히 하느님의 업적이고 온전히 인간의 업적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애당초 하느님 본연의 일이면서도 동시에 우리 본연의 일이고 봉사이고 행위일 수 있을까요? 이는 다만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행동하시도록 우리를 내어드리고, 그분이 우리를 통해 하시려는 바가 우리에게서 오롯이 투명하게 드러나게 될 때 가능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늘 ‘나 자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제가 바라는 모든 것이 바로 당신의 원의가 되게 해주십시오. 저의 뜻이 당신의 뜻이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의 열망이 아니라 그분의 약속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눈앞에 

 

지금까지 살펴본 하느님 나라의 비유들에는 또 하나의 특별함이 있습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이 특별함은, 당시 이 비유를 들었던 이들에게는 비유의 소재들이 바로 눈앞에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겨자씨는 채소밭에서 구할 수 있었고, 과일나무들은 바로 문 앞이나 마을 가까이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포도밭과 밀밭은 갈릴래아 구릉 어디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혀 다른 종류의 비유들로 이야기하실 수도 있었겠지요. 예를 들어 대도시나 대지주나 임금들의 세계에 빗댄 비유를 드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하느님 나라의 성장과 관련된 비유들을 당시 청중이 직접 눈앞에서 보아 알고 있는 바로 그 세계에서 끌어오십니다. 

 

왜 그리 하셨을까요? 하느님 나라가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구름 속에 있지 않습니다. 그 어딘가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 일상 한가운데서 하느님 나라가 일어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인내를 통해 오늘 이미 우리 가운데 행동하시는 바로 그곳, 그리하여 세상이 부활의 세상으로 바뀌는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가 발생합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8년 6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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