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학적 해설] 혼인잔치의 비유(마태22, 1-14)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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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타한인성당 | 작성일2011-10-08 | 조회수521 | 추천수0 | |
혼인잔치의 비유(마태22장1-14절)
[성서본문]
1 예수께서 또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 3 임금이 종들을 보내오 잔치에 초청 받은 사람들을 불렀으나 오려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른 종들을 보내면서 ''초청을 받은 사람들에게 가서 이제 잔치상도 차려 놓고 소와 살진 짐승도 잡아 모든 준비를 다 갖추었으니 어서 잔치에 오라고 하여라'' 하고 일렀다. 5 그러나 초청받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6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때려 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 7 그래서 임금은 몹시 노하여 군대를 풀어서 그 살인자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 8 그리고 나서 종들에게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전에 초청받은 자들은 그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9 그러니 너희는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10 그래서 종들은 거리에 나가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다 데려 왔다. 그리하여 잔치집은 손님으로 가득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 갔더니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를 보고 12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 왔소?'' 하고 물었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 내어 쫓아라.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14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개관]
1) 마태오복음(22.1-14)에는 임금이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푸는 비유가 있고, 루가복음(14.15-24)에는 어떤 사람이 큰 만찬을 베푸는 비유가 있다. 그런데 마태오와 루가가 제각기 어록에서 옮겨 썼다는 설도 있고(슈낙켄부르크), 제가기 고유 전승에서 채집하여 수록했다는 설도 있다(루가 14.15-24 주석 참조). 랍비 문헌에도 비슷한 비유가 전해 온다(바빌론 탈무드, 샤바트 153a). 2) 어쨌든 두 비유 밑바탕에는 예수 친히 발설하신 비유가 깔려 있다. 잘난 사람들보다 못난 사람들을 주로 상종하신 예수께서 당신 처신을 변호코자 그런 비유를 발설하셨겠다.(참조: 마르 2.17; 루가 15장; 마태 21.31ㄴ-32). 마태오와 루가의 비유형태 가운데서 루가의 형태가 예수님의 발설에 더 가깝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루가의 비유형태에도 전승 또는 편집과정 중에 첨가, 수정된 부분이 제법 있다. 마태오는 21.33-46절에서처럼 일종의 구원사를 엮어 비유를 우화로 변절시키다시피 했다. 3) 11-13절은 본디 1-10절과 상관없이 따로 마태오 교회에 전승된 비유였는데 마태오가 채집하여 이 자리에 배치했다는 설이 있다(그닐카). 이와는 달리, 마태오가 11-13절을 창작하여 첨가했다는 설도 있다(슈낙켄부르크). 4) 14절은 묵시문학적 성격을 지닌 경구인데 마태오가 채록한 것이다. 에즈라 4서 8.3에 비슷한 경구가 있다: “사실 많은 이들이 창조되었지만 적은 이들이 구원 받습니다”(에즈라 4서 8.41도 참조). 마태오는 경구 같은 유행어를 단락 끝에 메어다는 습성이 있다(19.30: 20.16). 5) 이처럼 이 비유는 마르코복음과 루가복음에 나오는 것과 비슷하지만 마태오는 마무리 부분에서 자신의 복음서 전체와 맥이 통하는 장면 하나를 덧붙임으로써 다른 복음사가들과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는 이 극적인 장면을 통해서 하늘나라는 선물이면서 그와 동시에 보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 상기시킨다. 하느님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기로 작정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초대를 받고 “예”라고 말만 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주석]
[2-8절] 1) 2절에는 임금(하느님), 임금의 혼인하는 아들(그리스도: 25.1-10; 2고린토 11.2; 묵시록 19.6-9). 잔치(종말 구원: 8.11; 25.21, 23; 26.29)등의 은유들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다. 2) 마태오는 21.33-46에서처럼 짤막한 구원사 또는 비구원사(멸망사)를 엮었는데, 이런 관점에 따라 2-8절을 풀이하면 이렇다: 하느님이 구약시대엔 예언자들을, 신약시대엔 사도들을 보내어 구원의 복음을 알리셨건만,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배척하고 죽였다(2-6절). 그래서 하느님은 66-70년 1차 독립전쟁 때 로마 군인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살육하고 마침내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 시가지와 성전을 불살라 버렸다(7절). 이스라엘은 불행이도 구원받을 자격을 상실했다(8절). 이렇게 이스라엘의 역사는 비극으로 끝난다.
[9-10절] 1) 9-10절에서 하느님은 새로운 구원사를 시작하신다. 곧, 그리스도교 전도사들로 하여금 도시 성문들로 가서 유다인이건 이방인이건 “악한 자들이건 선한 자들이건 모두” 교회로 모아들이도록 명하신다. 교회는 유다인과 이방인이 공존하는 혼성 공동체요, 종말에 이르기까지 악인과 선인이 공생하는 혼합 공동체다(13.36-43 가라지 비유 해설 참조). 2) 9-10절에서 가장 난해한 표현은 “길들의 시발점들”(공동번역은 “거리”로 번역)이다. 도시에서 시골로 가는 길들의 여러 성문에서 시골행 길들이 시작되는 만큼 “길들의 시발점들”은 정확히 말해 “성문들”이다. 여러 민족과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거래하고 잡담을 나누고 휴식하는 곳이 성문이다.
[11-13절] 1) 교회는 별의별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 속는 진짜 그리스도인도 많고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도 많다. 여가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그렇다(13.36-43 가라지 비유 해설 참조). 그러니 교회는 상속의 뒤범벅이다. 거룩하고도 죄 많은 교회다. 그러기에 교부들은 교회를 일컬어 성녀요 창녀라고 하지 않았던가. 2) 마태오복음에 따라 혼례복의 우의적 의미를 따진다면, 혼례복은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행함(7.24-27). 아버지의 뜻을 행함(7.21), 의로움을 행함(3.15; 5.20), 사랑의 이중계명을 행함(22.34-40), 자비를 행함(25.31-46)을 뜻한다. 그렇게 행하는 이만이 참 그리스도인이다. 3) “바깥 어두운 데로 내던져라. 거기서는 울고 이를 가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13절)라는 말씀은 거짓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시는 멸망선언이다. 같은 표현이 8.12; 13.42, 50; 24,51; 25,30에도 있다.
[14절] 위의 개관 4)항 참조.
[신학적 결론]
하느님 아버지인 왕은 자기 아들의 혼인을 축하하기 위해 “나쁜 사람이건 좋은 사람이건” 모든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줌으로서 구원과 부르심의 보편성이 강조된다. 그러나 종국에 가서는 각자에게 요구되는 개인적 응답이 역설된다. 즉 초대에 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혼인잔치에 걸 맞는 예복으로 갈아입는 데에도 응해야 한다. 이 예복을 갈아입었다는 것은 하느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결정적 징표가 된다. 어쩌면 왕이 예복을 갖추어 입지 않은 사람을 내쫒은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로 보인다. 그러나 이 부분을 덧붙임으로써 마태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성의와 응답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제자들 쪽에서 보이는 가장 사소한 몸짓, 최소한의 솔선적 자세에도 반드시 보답이 따르지만 사실을 아주 사소한 노력조차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하느님 나라에 도무지 합당하지 않은 제자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밖으로 내쫒기는 것 말고 다른 운명은 없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의 진리들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도 최소한 용서와 궁핍한 이들에 대한 자비의 예복을 입어야 한다.
[만년동 성당] 홈 페이지에서 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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