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예수님 이야기73: 율법학자와 가난한 과부(루카 20,45-21,4)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성경용어][꼭필청][꼭필독] 가능유 상태(potential being)와 현실유 상태(a ...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7-21 | 조회수9,517 | 추천수0 | |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73) 율법학자와 가난한 과부(루카 20,45-21,4) 교회에 드리워진 세속화 그림자 경계해야
- 율법학자들을 경계하라는 말씀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야기는 지도자의 처신과 하느님 섬김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깨운다. 사진은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 있는 이슬람 사원 황금 돔과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 모형(왼쪽 상단). [CNS 자료 사진]
율법학자를 조심하라는 예수님 말씀(20,45-47)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일화(21,1-4)는 율법학자와 과부, 부자와 가난한 과부가 대조를 이루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고 지도자의 처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성찰하게 해줍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20,45-47)
루카 복음사가는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모든 백성이 듣고 있는 가운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20,45)고 전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제자들을 향한 것이지만 제자가 아닌 사람들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르신 말씀의 핵심은 “율법학자들을 경계하여라”는 것입니다. 율법교사라고도 하는 율법학자들은 율법에 정통한 이들입니다. 이들은 기록된 또는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율법을 풀이하고 가르치며 율법에 따라 재판을 담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제 또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 가운데서도 율법학자가 있었지만 상인이나 장인 가운데서도 전문 교육을 받아 율법학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율법을 가르치고 풀이하고 적용하는 권위를 지니고 있어서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지도자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 율법학자들을 예수님께서는 “경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경계하라는 것은 단지 율법학자들과 마찰을 일으키거나 율법학자들의 미움을 사거나 혹은 그와 비슷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이 아니라 율법학자들처럼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는 경계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둘로 나눠서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첫째 말씀은 “그들(율법학자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기를 즐기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좋아한다”(20, 46)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의 긴 겉옷은 마치 법관의 법복처럼 율법을 풀이하거나 가르칠 때 입는 옷으로, 율법학자라는 신분과 권위를 나타내는 복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옷을 입고 나다니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율법학자 신분을 과시하고 싶어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좋아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로 사람들과 친교를 나누고 잔치를 축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대우를 받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말씀은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20,47)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에 따르면 율법학자들은 여러 방법으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었습니다. 과부들의 남편이 남긴 유산의 관리인 역할을 하면서 재산을 착복했고 법정에 나갈 수 없는 과부들을 대신에서 법정에 나간 대가로 과부들의 돈을 착취했고 과부들을 위해 길게 기도해 준 대가로 재산을 가로챘고, 때로는 과부들의 후한 대접을 이용해 재산을 착복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과부와 고아를 억눌러서는 안 된다는 것은 구약 시대부터 내려온 중요한 율법이었습니다.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탈출 22,21) 율법 전문가들인 율법학자들이 의도적으로 또는 교묘하게 율법을 거스르며 과부들을 등쳐 먹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20,47)이라고 그들의 기만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21,1-4)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고 있는 부자들을 보고 계시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21,1-2)
예루살렘 성전에는 주랑으로 둘러싸인 이방인의 뜰 안에 헤로데 시대에 다시 지은 헤로데 성전이 있었습니다. 이 성전은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여인들의 뜰에 이어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남자들의 뜰, 그리고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는 사제들의 뜰에 이어 성전 성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의 뜰에는 헌금을 모으는 나팔 모양의 헌금함 13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위의 성경 말씀대로라면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여인들의 뜰이 있는 곳에서 사람들이 헌금함에 예물을 넣고 있는 것을 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가난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는데, 렙톤은 당시에 통용되던 화폐 가운데 가치가 가장 낮은 그리스 동전이었습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로마 은화 1데나리온, 그리스 은화 1드라크마)의 144분의 1의 가치를 지닌다고 하니 오늘날 우리 돈으로 치면 몇백 원에 불과한 금액일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21,3) 이어서 그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21,4)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을 경계하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 과시하고 자랑하며 기만하고 위선을 부리는 율법학자들과 과부를 대비시키셨다면,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 말씀을 통해서는 부자들과 가난한 과부를 대비시키십니다. 부자들은 풍족한 가운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바쳤지만, 과부는 궁핍하면서도 가진 모든 것, 즉 생활비 전체를 봉헌합니다.
궁핍한 과부의 이런 태도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하다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대답한 율법교사의 말을(루카 10,27) 그대로 실천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율법학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해야 할 뿐 아니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돌보아야 할 과부의 가산을 등쳐서 자신을 배불리는 탐욕과 위선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 말씀처럼 더욱 엄중히 단죄받을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루카 복음사가는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는 말씀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일화를 통해 이제 갓 태어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일깨우고 있다고 성경학자들은 풀이합니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율법학자들처럼 처신하지 말아야 하며,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가난한 과부가 가진 것 전부를 헌금함에 바쳤듯이 그런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교회를 생각하는 이들은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세속화와 권위주의입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세속 사회에서는 높은 자리,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하고 사람들에게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사람들을 속여 등쳐먹으면서도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합니다. 세속의 이런 그릇된 행태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가슴 아파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혹시 우리 자신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는 그렇지 않은지 성찰해 봅니다. 우리는 지금 평신도 희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희년을 산다는 것은 이런 그릇된 모습을 청산하고 가진 렙톤 두 닢을 다 넣은 가난한 과부의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며 가슴을 치는 세리의 자세로 기도를 바치며(루카 18, 13),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것(루카 10,29-37)이 아닐까요?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7월 22일, 이창훈 위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