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엘리야가 죽기를 간청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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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8-06 | 조회수9,347 | 추천수0 |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엘리야가 죽기를 간청하다(Elija wünscht sich den Tod)
열왕기 상권에 따르면, 하루는 엘리야 예언자가 스스로 죽기를 간청합니다(1열왕 19,1-5). 엘리야는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박해받거나 쫓기는 사람이면 누구나 도망쳐 찾아가는 바로 그곳에 피해 있습니다. 황무지, 바로 광야입니다. 광야의 얽히고설킨 수많은 협곡과 메마른 골짜기들이 숨기 좋은 은신처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석회암 사이 갈라진 틈이나 동굴에 몸을 숨기면 아무도 찾아낼 수 없었지요. 하지만 그런 곳에는 먹을 것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물이 없었지요. 목이 타는 갈증을 이겨내야만 했습니다.
바알 숭배에 대항하여
엘리야는 도망치는 중입니다. 아합 임금과 그의 왕비 이제벨이 말하자면 국가 경찰력을 동원해 그를 쫓고 있습니다. 아합은 이스라엘 북왕국을 다스리는 임금입니다. 그는 이제벨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이제벨은 시돈 임금의 딸, 곧 가나안 여인입니다. 서로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른바 정략결혼을 한 것이지요. 이제벨은 혼인을 하면서 이전에 자신이 섬기던 신들, 특히 날씨와 비와 풍요의 신인 바알을 사마리아로 들여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에서는 이제 주님을 섬기는 것과 더불어 바알 숭배가 궁정의 공식적인 예배로 자리 잡습니다. 임금이 직접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세우고, 공공연히 바알을 위한 제단에서 의식을 거행합니다(1열왕 16,29-33 참조).
이스라엘에서 수많은 이들이 커다란 호감을 갖고 바알 숭배를 받아들입니다. 엘리야만이 이에 공개적으로 저항하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이로써 그에게는 이제벨 왕비의 분노가 치명적인 위협으로 닥칩니다. 엘리야는 왕비로부터 그를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습니다(1열왕 19,2 참조).
엘리야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그의 길을 말해줍니다. ‘엘리야’는 ‘나의 하느님은 야(훼)’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하느님은 주님(YHWH)이시고 다른 신은 없다’는 뜻입니다. 엘리야는 유일무이하신 주님을 위해 싸웁니다. 그의 확신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역사에서 체험한 하느님은 바알의 세계로 편입되어 그런 신들과 동일시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주님을 다른 신들과 나란히 함께 섬기는 것은 이미 조상들의 신앙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엘리야는 백성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1열왕 18,21)
엘리야의 말은 아마도 바알 사제들이 절뚝거리며 예배 의식의 춤을 추는 것을 빗댄 것이라 하겠습니다(1열왕 18,26 참조). 바알 사제들은 바알 앞에서 관절을 복잡하게 이리저리 돌리며 춤을 추었습니다. 한쪽 방향으로 돌렸다가 그 즉시 또 다른 방향으로 돌렸습니다. 이스라엘이 마치 그와 같았지요. 한 번은 주님께 향했다가 그 즉시 또 바알에게 향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자신에게 가장 요긴한 쪽으로 왔다갔다 했습니다.
엘리야의 탄원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하고 엘리야는 백성에게 묻습니다. 하지만 백성은 반항하듯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침묵합니다(1열왕 18,21 참조). 바알 숭배를 그만두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야의 가장 큰 고통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엘리야는 온 이스라엘에 맞서 ‘주님만이 홀로’라는 신앙을 굳게 지킵니다. 이로써 그는 사회적으로 깊은 고립 상태에 빠집니다. 동시에 생명의 위협도 당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광야로 도망칩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의 생명이 어서 빨리 끝나기를 간청합니다. 그는 고통에 짓눌려 하느님 앞에서 이렇게 탄원합니다.
“저는 주 만군의 하느님을 위하여 열정을 다해 일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당신의 계약을 저버리고 당신의 제단들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이제 저 혼자 남았는데, 저들은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저를 찾고 있습니다.”(1열왕 19,10)
하지만 이어지는 대목에서 하느님은 엘리야의 탄원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주님은 당신 예언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입을 맞추지도 않은 칠천 명을 모두 남겨 두겠다.”(1열왕 19,18)
엘리야는 혼자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에는 충실한 사람이 엘리야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엘리야의 탄원에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곧 지금 이 순간에 정말로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역사를 결판내는 것은 엘리야의 불같은 열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침묵하는 칠천 명 역시 아주 중요하지만, 그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결정적 차이
“이제 저 혼자 남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을 단순히 종교로 그리고 그 신앙의 역사를 그저 종교사로 간주하면, 엘리야의 말은 엄청난 과장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것이 인간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고, 따라서 그것이 바닥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것 자체가 인간의 욕구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종교적인 것이 단 한 사람의 충실성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서구 사회에서 그리스도교가 쇠퇴하면서 형성된 유동적인 형태의 종교적 현상들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모두 ‘자아 발견’의 테두리를 끊임없이 맴돕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신앙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것의 범주를 능가합니다. 이스라엘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욕구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 다시 말해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신앙은 기존에 있던 것, 이미 늘 인간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신앙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새롭게 시작하신 바로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이 출발은 인간적인 모든 가능성들과는 상반됩니다.
때문에 이 새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안녕만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부단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세상에서는 처음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습니다. 이 새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가냘픈 줄에 매달려 있습니다. 이 새것은 날마다 늘 소수의 신앙에 의해 지탱됩니다. 이 소수가 계속해서 또다시 동조자들을 발견하느냐 마느냐의 여부에서 이 새것의 역사가 결판납니다.
이런 배경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만, 열왕기 상권에 나오는 엘리야 이야기의 의미를 온전히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멀리 저 광야로 도망친 엘리야를, 싸리나무 아래 주저앉은 엘리야를, 깊은 좌절에 빠진 엘리야를, 어서 죽기를 간청하는 엘리야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하는 혼잣말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의 입에서 비슷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담!” “다 쓸데없는 일이야!” “불신이 점점 커지고, 불신과 함께 힘 있는 이들의 권력이 지배할 뿐이야!”
바로 정확히 그런 상황에서 무엇인가가 일어납니다. 곧 천사가 엘리야에게 다가와 그에게 힘을 북돋워줍니다. 천사가 엘리야를 흔들어 깨우며 “일어나 먹어라.” 하고 말합니다. 엘리야는 깨어, 뜨겁게 달군 돌에다 구운 빵과 물 한 병이 머리맡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먹고 마신 뒤에 다시 자리에 눕습니다. 그러자 주님의 천사가 다시 그를 흔들면서,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 하고 말합니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신 다음, 그 힘으로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당도합니다(1열왕 19,5-8 참조).
원천의 현재화
엘리야는 도움을 받습니다. 그는 천사에게서 빵과 물을 받아먹은 다음, 그 힘으로 하느님의 산까지 걸어갑니다. 바로 그 산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당신을 계시하셨고, 당신 백성에게 사회와 공동체의 새 규범을 주셨습니다. 엘리야가 바로 그 원천의 장소로 인도를 받은 것입니다.
원천의 현재화야말로 하느님 백성에게는 가장 본질적인 도움입니다. 아련한 추억도, 원천에 대한 그릇된 낭만도, 원천으로의 회귀도 도움이 못됩니다. 원천의 현재화만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바로 원천을 현재화할 수 있을 만큼 빵과 물을, 곧 힘과 도움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원역사의 끈이 위협을 당해 끊어지지 않도록 돌보십니다. 하느님 백성의 역사에서 결정적 한순간에 모든 것이 오직 한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모든 것이 바로 엘리야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를 도우십니다. 그가 살도록 그에게 빵을 주십니다.
연중 제19주일(나해)의 전례는 엘리야의 이 이야기를 우리 자신의 역사와 연결시킵니다(제1독서). 곧 또다시 성찬례의 제단 둘레에 모인 교회의 역사와 연결시킵니다. 이렇게 해서 전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과 당신 백성의 역사가 계속 이어질 수 있느냐 마느냐의 여부에 달렸음을! 그리고 이는 우리 각자 하나하나에게 달렸음을!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무 도움도 주지 않으신 채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성찬례의 빵을 건네주십니다. 그 빵이 우리를 매번 우리의 원천과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힘입니다. 그 빵이 우리를 바로 예수님의 복음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원천으로 이끌어줍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8년 8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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