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위령성월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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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수근 | 작성일2011-11-03 | 조회수1,414 | 추천수0 | 신고 |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위령성월을 이해하고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를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하세요~ 위령성월 1. 위령성월의 의의와 유래 11월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기억하며 연옥에서 정화 중인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와 선행을 하는 달이다. 죽은 이들을 잊지 않고 그들이 하느님 안에서 부활의 기쁨을 누리도록 도와주는 이 신심은 가톨릭의 가장 큰 신심 중의 하나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따르는 것이며, 단련받는 영혼의 처지를 도와주는 사랑의 행위이므로 교회에서는 특히 11월 한 달 동안 연옥 영혼이 천상의 행복을 누리게 되도록 기도해 주고 있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구약성서의 마카베오 후서이다. 기원전 163년 유다 민족의 지도자인 마카베오는 전쟁터에서 죽은 유다인들을 장사 지내면서 그들이 지은 죄가 용서될 수 있도록 애원하고 기도와 헌금을 바쳤다. 기원 후 2세기부터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일반신자들 가운데 보급되었으며, 특히 이 관습은 로마 카타콤바 안에 새겨져 많은 기도문, 즉 죽은 이들이 죄의 사함을 받아 천상 행복에 들게 해 달라는 내용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최초의 카타콤바는 1세기에 설치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고 2세기 초부터 가족 묘지로 출발하였다가 3세기부터는 신자들의 공동묘지로 사용되었다 카타콤바의 벽에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벽화들, 즉 초기 신자들의 종말론적 사상을 표현한 그림들이 그려졌는데, 그 중심 주제는 하느님에 의한 구원, 천국에서의 희망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구세, 내세의 신앙, 그리스도의 신성, 세례, 성체, 죽은 이를 위한 전구, 모든 성인들의 통공 등을 표현하였다.
죽은 이를 위한 최초의 공식기도문은 211년에 떼르뚤리아노가 쓴 저서에 나온다. 그는 이 저서에서 ’죽은 자들의 기일’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그날 특히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오래 전부터 실시된 관습이라고 하였다. 또한 3세기에 교회가 사용한 ’히뽈리토의 미사경문’에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문이 나왔으며 4세기에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문을 전례기도, 공식기도, 개인기도 등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2.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와 선행의 의미 ’모든 성인의 통공’에서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가능해 진다. 우리는 연옥에서 단련을 받고 있는 죽은 이들과 천국의 성인들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며 서로 도움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러한 통공은 우리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대신 기도하고 속죄함으로써 그들이 죄벌을 용서 받게 된다.
이것은 구약시대로부터 있던 일이다. "경건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갸륵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2마카 12, 46) 마치 감옥에 갇힌 사람이 스스로 사면을 받을 수 없어 형벌을 마치고 출옥의 날만 기다리듯 육체를 벗어난 연옥 영혼들은 다만 연옥에서 되도록 빨리 벗어날 희망만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연옥 영혼들을 대신하는 우리의 기도와 속죄 행위를 하느님께서는 받아주시고,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속죄하는 것은 그들이 진 빚을 대신 갚아 주는 것과 같다.
그들이 살아 있었을 때, 우리로 말미암아 하느님께 범죄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상에 있는 우리가 그들을 대신하여 기도하고 속죄함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 때문에 하느님께 진 그들의 빚을 대신 갚음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과 같다.
사도 요한의 말대로 우리는 죄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1요한 1,8) 남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장담할 수 없다. 우리도 연옥에 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그들이 천국에 갔을 때 우리의 기도와 희생을 잊지 않고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빌어 줄 것이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인간이 사랑으로 서로 돕는 것을 즐겨 하시기 때문에 서로 공을 통할 수 있도록 섭리하시어 우리의 기도와 성인들의 기도를 받아 주시는 것이다.
3. 위령의 날 위령의 날’을 11월 2일에 지내는 것은 11세기에 클뤼니 수도원의 오딜로 원장이 다른 수사들과 함께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 다음 날 죽은 자를 위해 성무일도를 바친 일에서 유래한다. 그 후 이 관습은 일반 신자들 가운데 널리 보급되었으며, 라틴교회에서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이날 사제들은 세 번의 미사를 바칠 수 있도록 허락되었는데, 이는 15세기에 스페인의 도미니코회 수사들이 시작한 것이며, 1748년 교황 베네딕토 14세의 인준을 받은 후 유럽과 남미에 급속히 전해졌다. 위령의 날에 드리는 세대의 미사 중에서 사제는 한 대를 개인적인 지향으로, 또 한 대를 죽은 이를 위해,나머지 한 대를 교황의 지향에 따라 봉헌한다. 이 세 대의 미사전례 주제는 ’죽은 자를 위한 청원’이다. 이 주제의 배경에는 ’죽음의 엄숙한 현실’,’육신의 부활’,’그리스도의 심판’,그리고 ’영원한 생명’ 등 그리스도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 주제가 깔려 있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수도회홈에서 www.ofmconv.or.kr
위령의 날 Commemoratio Omnium Fidelium Defunctorum
연옥 영혼들을 기념하는 것은 모든 성인의 축일을 보충하는 뜻으로 하는 것이다. 이 동안에는 특히 사도 신경의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하는 구절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광범위한 의미로서의 성인은 천당에 있는 영혼을 말한다.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며, 또 서로 형제 자매가 되는 것이다. 다만 존재 상태가 다른 것이니, 천국에 있는 영혼은 영원한 복을 누리는 위치에 있고 세상에 있는 영혼은 악마의 유혹에 대항해 싸우고 있으며 은총 지위를 보존하여 공을 세워야 하고, 연옥에 있는 영혼은 곧 천국에 들어갈 처지에 놓여 있으면서 그때까지 보속 단련하는 것이다.
연옥 영혼도 상존 은총을 간직한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그들이 임종할 때에 대죄는 없었지만 소죄라든지 혹은 용서를 받은 대죄의 잠벌(暫罰)이 있는 것이다. 성서 말씀으로 명백히 한 바와 같이, 천국에는 완전히 부채를 갚은자, 완전히 깨끗한 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고행이나 기도로 유한한 잠벌을 보속하고 사후 즉시 천당에 갈 수는 있는 것이다.
연옥 영혼의 가장 큰 고통은 빨리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우리는 그 고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물질인 육신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영적 감각에 둔한 것이다. 그러나 일단 죽어서 영혼이 육신을 떠나면 창조주이신 하느님만을 몹시 그리워하게 되기 때문에 그 곁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장애물을 볼 때에 무한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이 고통은 하느님과 떨어져 있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더욱 심한 것이다. 만일 이런 고통 상태가 영원히 계속된다면 이는 곧 지옥일 것이나, 연옥의 경우에는 한도가 있을 따름이다. 또 이 기한은 다하지 못한 죄의 보속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결정 되는 것으로, 다른사람이 그 죄의 보속을 대신해 주면 그만큼 기간이 단축되는 것이다. 연옥에 있는 영혼은 자발적으로 보속 행위는 할 수 없다. 그에 반하여 현세에 있는 우리는 얼마든지 효력있는 속죄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처지에 놓여 있다. 그때문에 여러 가지 고행과 자선과 기도와 미사를 바치는 등으로 그들을 돕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축일은 매년 우리가 행하는 위대한 사업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데 그 진의가 있는 것이다.
교회는 "주님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하는 열렬한 기도로 연옥 영혼을 위해 대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한다. 가톨릭적 사랑의 정신에서 말하더라도, 자신을 도울 수 없는 자를 도와 주는 것이 큰 의무이기도 하다. 그리고 연옥 영혼을 위해 많은 공로를 쌓은 영혼이 훗날 연옥에 들어간 영혼이 그 은혜를 감사히 여겨 하느님의 대전에 은인을 위해 인자하심을 간청하기 때문이다.
연옥에는 하느님을 사모하는 고통 외에 또다른 고통이 있다 한다. 그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 주님께서도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으나, 아마 연옥에서 보속해야 할 죄악의 종류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연옥 영혼을 생각할때 그들이 혹심한 고통을 달갑게 참아 견디고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의 정의 때문에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안다. 자기가 받고 있는 벌도 당연한 것임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어김없이 천국에 들어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고통 중에서도 위안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현세에서 처럼 다시는 상존 은총을 잃을 염려는 없다. 또 현세 사람들이 그들을 기억함이 곧 그들의 위로가 된다. 비록 현세에 친구, 친척이 아무도 없는 영혼이라도 모든 죽은 잘들을 추모하는 교회의 기도에는 그들이 다 포함되어 기억되는 것이다. 교회는 매일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이 이날 성묘를 하며 사망한 친족들을 기억하는 정성에서 묘지를 깨끗이 꾸미고 그들의 명복을 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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