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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하느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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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9-07 조회수8,067 추천수0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하느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Wie das Reich Gottes kommt)

 

 

연중 제23주일(나해) 제1독서에서 우리는 이사야서 35장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이루는 역사가 바로 기원전 586년 바빌론 제국의 예루살렘 점령과 유다 왕국의 멸망입니다. 이 때 바빌론으로 수많은 유다인들이 끌려갔지요. 그들의 처지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낯선 땅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말도 다른 나라에서, 그것도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합니다. 자신들의 하느님 앞에서 무릎 꿇고 엎드릴 성전도 그들에게는 더 이상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제는 당신 백성을 영영 떠나신 것일까요? 이스라엘에 도대체 미래란 게 있을까요? 영혼의 궤양처럼 좌절이 그들 사이에 스며듭니다. 자신감은 사라지고, 눈은 침침해지고, 귀는 멀어갑니다. 손은 아래로 쳐지고, 다리는 절뚝거립니다. 입심 좋은 이들조차 벙어리가 됩니다.

 

 

믿기지 않는 예고

 

하지만 이처럼 절단 난 상황 한가운데서, 유배의 삶을 살아가는 유다인들에게 모든 것을 일거에 뒤엎는 새로운 예고가 전해집니다. 얼마나 새로운지, 이에 견줄 적당한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이사 35,2) 

 

낯선 땅으로 끌려간 이들에게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면,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지리라고! 당장 모든 것이 바뀌고, 그런 일은 곧장 일어나리라고 예언자는 말합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이사 35,5-6)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이 시온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게다가 모든 것이 바뀌는 이 일은 주변 환경마저도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길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힘들고 불가능한 여정이 아니라 걸을 만한 길이 될 것입니다. 대로가 되고, 귀향하는 이들에게는 열린 길이 될 것입니다. 광야에서 샘들이 솟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입니다. 황무지 한가운데 호수들이 생기고, 곳곳에 꽃들이 피어날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귀중한 것은, 이제 어디서나 정결함이 넘칠 것입니다. 마음에도, 손에도, 주변 어디서나, 토라가 요구하는 그 정결함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이사 35,7-10 참조).

 

모든 것이 처음부터 그래야만 했던 그대로 되고, 모든 것이 다시 온전해질 것입니다. 마침내 의로움이 회복될 것입니다. 여러 번역들이 거칠게 ‘하느님의 분노’(이사 35,4)라고 옮기지만, 하느님의 보복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들이닥쳐 불의를 몰아낼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곧바로 다시 무너지고 마는 허상이나 우발적인 사건, 또는 단순한 중간 과정이 아니라, 거기 “끝없는 즐거움”(이사 35,10)이 넘칠 것입니다.

 

이사야서 35장의 그러한 예고야말로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요!

 

이사야서의 이러한 예고를 바탕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외치시는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마음속에만 도래하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이 도래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은 모든 것을 변모시키고자 합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모든 관계가 질서를 이루게 되기를 바랍니다. 죄지은 이들이 회심하고, 혼돈이 아름다움으로 바뀌기를 바랍니다. 병든 이가 건강하게 되고, 눈먼 이가 보고, 말 못하는 이가 다시 말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미래에 어느 갈 수 없는 섬 유토피아에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하느님 백성 한가운데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지에 대해 루카 복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루카 7,22) 

 

하느님 나라가 오고, 그러면 옛것이 된 세상은 바뀝니다.

 

 

어두운 뒷면

 

하지만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은 이사야나 예수님에게서나 본질의 한 측면일 따름입니다. 거기 또 다른 측면, 곧 어두운 뒷면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어두운 뒷면을 실제 역사는 똑같은 무게로 보여줍니다. 이를 여기서는 다만 간접적으로 간단히 묘사할 수 있을 뿐입니다.

 

곧 페르시아 왕 키루스의 칙령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유다인들은 쇠락한 유다 땅으로 돌아옵니다. 이들에 대해 이사야서 35장은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리라고 예고한 바 있습니다(이사 35,10 참조). 하지만 그들 앞에 놓인 것은 망가진 길들과 황무지로 변한 포도밭과 폐허로 뒤덮인 예루살렘이었습니다. 무너져 내린 성벽과 불타버린 성문들과 그 땅으로 흘러들어온 이민족들의 조롱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곡식을 사기 위해 자신의 자식들마저 저당 잡혀야 할 상황이었지요(느헤 5,1-5 참조).

 

예수님에게서는 상황이 달랐을까요? 예수님과 함께 시작된 부푼 기대 ‘갈릴래아의 봄’은 금세 끝이 나고,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세를 규합하고, 그분을 향한 반대는 커지고,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일부마저 그분을 떠납니다. 마지막에 그분은 결국 십자가에 달려 굴욕적인 죽음을 당합니다.

 

이사야의 매혹적인 예고가 틀렸던 것일까요? 이사야서 35장과 성경의 수많은 다른 예언의 말씀들이 헛된 꿈과 순진한 동화에 지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도 어쩌면 유토피아를 꿈꾼 여러 인물들 가운데 하나였을까요? 사람들을 현혹하여 현실에서 도망치게 만드는 유토피아 말입니다.

 

물론 당연히, 아닙니다. 눈을 열고 정확히 보면, 그처럼 충만한 예언과 명확한 말씀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성경 본문들이 전혀 다른 성격의 본문들과 함께 엮여 있음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두 본문들이 서로 상반된 지점을 가리킵니다.

 

그 예로 이사야서를 봅시다. 앞서 말했듯이, 이사야서 35장은 바빌론에서 돌아오는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귀향을 예고합니다. 하지만 같은 이사야서의 다른 곳에서는 하느님의 종 이스라엘이 어떻게 굴욕과 무시를 받고 품위를 잃고 학대를 당하는지 말합니다. 곧 하느님의 종은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지고,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가 되며,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습니다.

 

이 하느님의 종, 이 어린양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입도 못 열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기 목숨을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오로지 그렇게 해서만, 세상은 변모하고, 하느님의 계획은 성공을 거둡니다(이사 52,13-53,12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 참조).

 

그리고 이제, 예수님에게서는 어떠했을까요? 이스라엘의 운명 전체가 그분에게서 집약됩니다. 그분은 아름다운 유토피아를 상상한 몽상가이셨을까요? 분명 아닙니다. 그분 역시 온 나라를 집어삼킬 듯한 위협적인 가시덤불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마셔야 하는 잔에 대해, 당신이 받아야 하는 죽음의 세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가야만 하는 예루살렘을 향한 길에 대해, 희생제물로 내놓을 당신 목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낮춤과 숨김의 원리

 

그렇다면 이제 어찌 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느님 나라가 올 수 있을까요? 하느님 나라는 이사야서 35장이 예고하는 모습으로 올까요? 아니면, 이사야서 53장이 그리는 모습으로 올까요? 하느님 나라는 ‘갈릴래아의 봄’처럼 올까요? 아니면 십자가에서 올까요? 우리 마음을 한껏 드높이는 놀라운 하느님 예배의 순간에 올까요? 아니면 날마다 죽는 희생에서 올까요?

 

물론 하느님 나라는 둘 다에서 옵니다. 둘 다 맞습니다. 어느 한 편이라도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질병과 치유, 슬픔과 행복, 실패와 성공, 비참과 위로가 서로 함께 엮여 있고, 이는 그 어떤 과장이나 미화도 없이 매번 날마다 살아야 하는 진실이자 피할 수 없는 삶의 변증법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하느님 나라는 옵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이 처음부터 전적으로 옳았습니다. 그분은 속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습니다(루카 17,20 참조). 하느님 나라의 광채가 우리 눈에 밝히 빛나는 순간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그 순간이 값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대개 숨겨진 채로 옵니다.

 

후에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된 요셉 라칭어는, 어쩌면 그의 저작 가운데 최고의 책인 『그리스도교 입문』(한국어판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에서 ‘그리스도교적인 것들의 구조’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지닌, 어디서나 드러나는 본질적 구조들을 열거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낮춤과 숨김의 원리’입니다.

 

라칭어에 따르면, 하느님은 완전한 타자이시기만 한 게 아닙니다. 그분은 또한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숨어 계신 분, 알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당신을 드러내시는 순간에, 그 즉시 그분은 비천한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우리가 무시하고 지나치는 분, 알아보지 못하는 분이 되십니다. 그분은 작은 것 안에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심으로써, 오직 그렇게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라칭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지구를 보라. 지구는 우주에서 무無와 같다. 하지만 지구라는 무는 우주에서 하느님이 행동하시는 지점이다. 이스라엘을 보라. 이스라엘은 무수한 권력 가운데 무와 같다. 이 무는 하느님이 세상에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지점이다. 나자렛을 보라. 나자렛은 이스라엘 안에서 다시금 무와 같다. 이 무는 하느님께서 결정적으로 현존하신 지점이다. 마침내 십자가를 보라. 이 십자가에 한 분이 달려 있다. 실패한 존재이다. 하지만 이 십자가야말로 인간이 하느님을 만질 수 있는 지점이다. 그리고 마침내 교회를 보라. 인간 역사에서 문제투성이의 존재이다. 이 교회가 자신이 하느님 계시의 항구한 지점이라고 주장한다.”(『그리스도교 입문 Einführung in das Christentum』, 209쪽)

 

요셉 라칭어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숨기시는 원리는 교회에도 해당된다. 하느님은 교회 안에서도, 그리고 이와 더불어 교회를 통해 이루시는 세상의 변모에서도 보이지 않으시고 숨어 계신다. 아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하느님은 여기서도 그렇게 당신 자신을 낮추심으로써만 당신을 드러내신다.

 

하지만 이는 하느님께서 행동하신다는 사실 역시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이사 35,2)처럼 변모시키리라는 사실도 변함이 없다. 심지어는 가련한 거지와도 같은 우리를 통해 그렇게 하신다. 변치 않고 여전히, 그분의 나라가 끊임없이 온다.

 

하지만 하느님은 바로 비천한 가운데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다. 겉보기에 무수한 실패 속에서, 위기 한가운데서, 심지어는 자주, 이름 없는 고통들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우리 자신의 노력과 영광 때문이라고 내세우고 싶은 유혹에 우리가 결코 빠지지 않도록!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8년 9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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