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민수기 20장 므리바의 물에 관하여....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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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1-12-09 | 조회수367 | 추천수2 | 신고 |
“하느님과 마주보고 사귀던 사람”
<사진설명>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신명 6,5). 유대인들은 모세에 의해 전해진 이 말씀을 지금도 성전이나 집 문설주에 달아 놓고 드나들 때마다 경의를 표하고 있다. 이는 신명기 6장 6-9절 말씀에 따른 것이다. 한 정통파 유대인이 예루살렘의 회당을 지나며, 대문에 달아놓은 신명기 6장의 말씀을 만지고 있다.
모세에 의해 시작된 ‘신정정치’는 영원한 최고의 법이자 최상의 헌법
모세오경은 평등에 관한 최초 선포 산줄기는 으레 파도를 타듯 높은 봉우리가 낮은 봉우리를 거느리면서 뻗어나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광야에서는 한 번도 그런 산을 만나지 못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시나이 반도 광야의 산들은 느닷없이 땅에서 불끈 솟아오른 것처럼, 낮은 봉우리들을 거느리지 않았다. 깎아지른 급경사에 억센 주름들만 수없이 아래로 뻗어 내리고 있었다. 그 억센 생김만큼 사람의 접근을 꺼리는 듯했다.
하지만 느보산(현 요르단 왕국의 마다바 읍에서 북서쪽으로 약 10km지점에 위치한 산)은 달랐다. 편안했다. 삼형제가 서로 의지하고 서 있는 형상이다. 가장 높은 봉우리가 니바(Niba)로 높이 835m이고, 두 번째 높은 봉우리는 높이 790m 무카야트(Mukhayyat),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는 높이 710m의 시야가(Siyagha)다. 물줄기가 흐르듯, 높은 봉우리가 낮은 봉우리들을 거느리고 뻗어나가는 편안한 모습이다.
지팡이에 의지한 백발의 한 노인이 느보산의 막내 봉우리인 시야가(성경에는 피스가-신명 34,1) 정상에 서서 가나안 땅을 내려 보고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씨가 오히려 더 야속했다. 보지 않았으면 이처럼 마음이 아프지 않을 텐데…. 꿈에도 그리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사해(死海)와 그 서북쪽에 위치한 쿰란동굴, 오아시스 도시 예리코와 요르단강, 요르단강과 예루살렘 사이의 유대사막, 그리고 예루살렘의 동부 구릉에 있는 올리브산 정상이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곰곰이 되짚어 본다. “너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는 땅을 멀리 바라보기만 할 뿐 들어가지는 못한다”(신명 32,52).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반역과 자신의 죄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민수 20,2-13 ; 27,12-14 ;신명 1,37; 4,2 ;32,48-52 참조).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이제 유대 후손들의 몫이 될 것이다.
모세는 하르르 긴 한숨을 내쉰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는 하느님과 함께한 지난 세월을 천천히 정리할 시간이다.
“37년…. 많은 일들이 있었지….” 모세 자신과 유대인들은 새로운 유형의 사회를 창조했다.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모든 것을 새로 세웠다. 그것은 반항과 저항의 결과였다. 나라 없는 노예민족이었던 유대민족이 지배민족이었던 이집트에 항거했다.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이집트의 회유와 협박 저지에도 불구하고 광야로 도주했다. 세상의 질서(힘과 강자의 질서)를 초월하는 유일신으로부터 주어지는 윤리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던 유대 민족은 그 어떤 문명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법률을 수여받았다. 그 중심에 모세가 있었다.
모세는 훗날 자신으로부터 기원을 두는 모세오경(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이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유대민족의 신앙, 사회, 정치 제도의 모든 틀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상상했을까. 유대민족이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도구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중요한 사실은 모세에 의해 유대민족이 자신들만의 새로운 정치체계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기원 후 66년경, 로마에 대항해 반란군을 지휘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37?~100?)는 모세 당시 유대 정치체제를 ‘신정정치’(Theocracy)라고 불렀다. “모든 통치권을 하느님의 손 안에 맡겨드리는 정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하느님은 모세를 매개체로 법률을 제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법률이 이행되도록 끊임없이 모세에게 개입하셨다. 하지만 여기서 신정정치는 단순히 강압의 정치가 아니었다. 법 앞에서는 모든 이들이 평등했다. 초세기 디아스포라 유대인 학자 필로(Pilo)는 이를 가리켜 ‘민주주의’(Democracy)라고 불렀다. 그리고 “영원한 최고의 법이자 최상의 헌법”이라고 했다. 많은 유대학자들은 모세의 법이 인류 최초의 권리장전이라고 말한다. 모세오경, 즉 율법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권리를 소유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모세오경은 평등에 관한 최초의 선포였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며, 동시에 법률 앞에서도 평등했다. 훗날에는 혹시 나타날 수 있는 사회 속 불평등을 위해 정의라는 안전장치도 만들어진다.
모세는 지팡이를 돌려 서서히 산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곧 쓰러져,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성경은 모세의 죽음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신명 34,10).
‘주님께서 얼굴 마주보고 사귀시던 사람’, 모세를 잃은 유대민족은 큰 슬픔에 휩싸인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압 평야에서 삼십 일 동안 모세를 생각하며 애곡하였다”(신명 34,8). 그 곡성이 요르단 강 건너 가나안 땅에까지 울려 퍼졌다.
[가톨릭신문, 2009년 5월 3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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