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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이스라엘의 예언자, 오늘날의 예언자: 위대한 전승의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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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9-21 조회수8,331 추천수0

[이스라엘의 예언자, 오늘날의 예언자] 위대한 전승의 새로운 시작

 

 

이사야 3부작

 

이사야 예언자의 이름(וּהיﬠשׁי)은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으로, 이사야의 신학 사상을 한마디로 응축한다. 이사야와 그의 제자들은 큰 시각과 깊은 성찰로 오직 주님만이 온 세상을 보편적으로 구원하신다는 깨달음을 전하려고 한결같이 노력했다.

 

이사야 예언서가 둘 이상의 서로 다른 인물 또는 집단이 서술하고 전승하였음을 현대 신학계에서는 널리 인정한다. 이사야서 1부는 위대한 예언자 이사야의 육성이 담겨 전하는 본문이지만, 2부와 3부는 이사야의 제자들이 유배 중에 기술하고 전승한 본문으로 본다.

 

고대에는 스승의 가르침을 소중히 보존하여 오직 스승의 방식대로 독서하고 성찰하는 제자 집단이 존재했는데, 이사야서도 그런 고대 문헌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사야서의 2부와 3부는 제자 집단의 놀라운 충실함과 통일성을 드러낸다. 이렇게 높은 수준의 문학적 신학적 통일성 때문에 이사야서는 오랜 세월 동안 교회에서 하나의 단일한 작품으로 통용되었다.

 

 

중앙 무대의 저항 예언자

 

이사야의 출생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예루살렘의 중앙 무대에서 활약한 인물로 추측할 뿐이다.

 

그의 문체는 격조 높고 탁월하다. 그는 국내 정세뿐만 아니라 외교적 사안 등에서도 훌륭한 식견을 보여 준다. 그는 임금이나 고위 관리와 직접 대화하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이사 37장 등 참조). 신학적으로도 그는 하느님께서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을 선택하셨음을 강조하였다. 특이하게도 그는 ‘여예언자’와 결혼을 했으니(8,3), 말하자면 ‘맞벌이 부부 예언자’였던 셈이다.

 

이사야가 활약하던 시대는 외형적으로는 평화기였다. 그런데 그는 변방의 저항 예언자들과 호응하여 신랄한 비판의 언어를 쏟아 내었다. 이사야서의 초입부터 “탈선한 민족/ 죄로 가득 찬 백성/ 사악한 종자/ 타락한 자식들!”(1,4)이라는 비판의 어조는 시종일관 계속된다.

 

그는 특히 가난한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특별한 자비를 선포한다. 그래서 이런 권고를 아끼지 않는다.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1,17). 이사야의 이런 언어는 변방의 저항 예언자들이었던 미카와 아모스를 빼닮았다.

 

한마디로 그는 변방의 저항 예언자에 공감하는 중앙 무대의 엘리트 예언자였다. 어쩌면 좋은 집안에 명문 대학을 나와 사회 개혁의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은 인물에 빗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와 그의 제자들은 히즈키야나 요시야의 개혁에 깊이 참여하였을 것이다.

 

 

탁월한 예언자

 

이사야 예언자에게는 다른 예언자에게서 찾기 힘든 일종의 ‘탁월함’이 있다. 그는 국내의 사회적 현실을 비판하면서도 유독 이스라엘의 외교에 대해서 많은 말을 남겼다. 그는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강대국(이를테면 아시리아)을 견제하려고 다른 강대국(이를테면 이집트)을 섬기는 정책을 비판하였다. 그의 비판은 ‘현실 외교 정책’의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궁극적으로 누구를 신뢰하는가?’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강대국과의 동맹은 한시적인 안전만을 보장할 뿐이다. 하느님 백성은 강대국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을 신뢰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이사야는 강대국과의 동맹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근본적 태도를 지적한 것이다. 그는 ‘공정과 정의’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하느님 백성의 근본임을 역설했다.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을 온 세상에 퍼뜨리려고 외국과 공조하고 때로 스스로 보조적 역할을 자임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강대국의 뜻에 따라 하느님 신앙을 뒤로 물리거나 축소할 수는 없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매우 외교적이고 정치적 언어로 전하지만, 사실 그 내용은 이렇듯 무척 신학적이다.

 

이사야의 주장은 우리나라의 경험에 비추어 새삼스레 다가온다. 강대국과 친선을 유지하는 ‘외교 수단으로써 사대주의’는 현실적 정책이지만, 사대주의를 내면화하여 강대국을 마음으로 섬기는 태도는 결국 조선조를 망국으로 이끌지 않았는가. 필자는 이사야 예언자를 묵상하며 우리나라에 이런 예언자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이사야 예언자의 탁월성은 다른 예언자와 달리 먼 앞날 구세사의 충만한 계획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는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7,14)라며 구세주의 동정 탄생을 예언했다. 또한 구세주께서 다스리실 세상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손에 잡힐 듯 그려 내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11,6.8).

 

 

유배 중의 충실한 제자들

 

이사야의 예언대로 평화와 번영은 끝났다.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백성은 유배를 가야 했다. 이사야 예언자는 ‘우찌야-요탐-아하즈-히즈키야’ 임금 시절에 생존하였다(1,1 참조).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유다를 쳐들어 왔을 때(36-37장), 곧 기원전 701년 무렵에 그는 어림잡아 마흔 살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배가 시작되었을 때 그가 탄생한 지 대략 160년이, 유배가 끝날 때는 190년 정도가 지난 세월이다.

 

이사야 예언자가 창세기의 전설적 인물들처럼 극단적으로 장수했다는 기록도 없다. 하지만 하느님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오히려 제자들을 통해 전혀 식어들 줄 몰랐다. 제자들은 누구보다 스승의 가르침에 충실했고, 스승의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백 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지나 유배라는 새로운 환경에 놓였지만, 이사야 예언서는 놀라운 통일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런 통일성은 역설적으로 이사야 예언자가 얼마나 강한 영향력을 남긴 위대한 예언자인지를 역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독일의 라이너 알베르츠 교수는 이사야 예언서 2부를 기록한 유배 중의 제자들을 성전의 창의적 예술가 집단으로 추측하였다. 먼저 이들의 문체는 매우 시적이다. 이사야서 2부에는 산문이나 설교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들은 오로지 아름다운 시가를 노래한 사람들인데 그 중에서도 찬미가에 능하다.

 

이들의 문체를 면밀히 분석하면 고대의 전승에 무척 밝은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유배 전 제1 성전의 의례에서 노래를 담당했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제1 성전의 성가대나 전례 담당자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사야 예언자가 좋은 교육을 받은 이라면 당연히 고대의 문학에 밝았을 것이니, 그는 제1 성전 의례에서 찬미가 등을 담당하였거나 깊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조심스레 추측할 수도 있다. 이사야서 2부와 3부의 제자 집단은 어쩌면 스승의 신학뿐 아니라 창의성까지 고스란히 물려받은 집단일 것이다.

 

 

신학적 도약

 

제자들의 창의성은 이스라엘의 신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들의 창의성이 잘 드러나는 대목을 꼽으라면 먼저 키루스의 승리를 찬양하는 대목을 들 수 있다(41장 등). 아마 이 대목이 구약 성경에서 ‘외국 임금의 승리’를 찬미하는 최초의 본문일 것이다. 창세기 시절이나 광야 시절이나 유배 이전의 왕국 시절이나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임금이 승리하도록 도와주시는 분이셨다. 하느님께 순종한 임금은 승리하였고 그렇지 않은 임금은 패배하였다는 기록이 구약 성경에 풍부하다.

 

하지만 키루스라는 외국 임금의 승리를 통해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기존의 전승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다. 전승의 도식을 따르자면 키루스라는 외국 임금의 승리는 이스라엘의 패배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사야의 제자들은 ‘패전의 신학’을 ‘승전의 신학’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래서 알베르츠는 키루스의 승리를 찬양하는 대목을 “모든 공식 전승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평가했고, 이런 창의성은 오직 한없는 예술적 상상력으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것은 그 이전의 어떤 신학자 집단도 감히 꿈꾸지 못했던 것이다. 오직 이 세상에서 가장 크시고 가장 위대하신 하느님의 권능을 깊게 신뢰하는 시인만이 토해 낼 수 있는 언어라는 것이다.

 

이사야의 제자들이 ‘보편적 창조주’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한 것도 이렇게 크신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불행하여라, 자기를 빚어 만드신 분과 다투는 자! … 진흙이 자기를 빚어 만드는 이에게 ‘당신은 무얼 만드는 거요?’ ‘당신이 만든 것에는 손잡이가 없잖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45,9)는 대목에서 ‘빚어 만드신 분’(רצי)으로 옮긴 낱말은 예레미야서 18장과 19장에서는 ‘옹기장이’로 옮긴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히브리어로 ‘창조주’라는 뜻도 된다. 이 말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지어 바친 사람은 이사야의 제자들이 처음이다. 이런 찬미는 하느님께서 온 세상을 빚어 만드신 분이라는 강한 믿음이 없다면 애당초 불가능하다.

 

 

구세주를 예언하다

 

결국 이사야의 제자들은 오직 하느님만이 유일신이심을 고백한다. 이미 모세는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신명 4,35.39) 분명히 했지만, 유배 이전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몸과 마음을 바쳐 오직 주님만 섬기라는 ‘유일 섬김’(monolatry) 신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사야의 제자들부터 본격적인 ‘유일신론’(monotheism)의 신앙을 전개한다. 이사야서 2부에서는 하느님께서 직접 “나 이전에 신이 만들어진 일이 없고 나 이후에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으리라.”(43,10)고 못 박으신다.

 

이사야 제자들의 신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창조주요 유일신이신 하느님께서 이루실 보편적 구원을 스승처럼 손에 잡힐 듯 묘사했다. 구세주를 예고하는 ‘주님의 종의 노래’ 네 편이 모두 이사야 2부에 전한다(42,1-9; 49,1-7; 50,4-11; 52,13-53,12 참조). 그들은 미래에 오실 구세주의 모습을 가장 생생하게 예언한 사람들이었다.

 

하느님 백성은 망국과 유배를 겪어야 했지만, 이사야와 그의 제자들이 활약한 200여 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교와 신학은 진정한 보편성의 종교로 거듭났다. 그들은 평화기에는 가난한 사람 편에 서서 저항의 언어를 쏟아 낸 사람들이요, 유배의 고통을 통해 하느님의 참뜻을 깨달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용기와 창의성으로 위대한 전승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고대 근동과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평신도 신학자이다. 주교회의 복음선교위원회 위원이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 위원이다. 저서로 「구약 성경과 신들」, 「신명기 주해」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8년 9월호,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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