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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왜 천주교, 개신교의 분위기가 이렇게 다른가요? 카테고리 |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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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하경호 쪽지 캡슐 작성일2011-12-22 조회수388 추천수0 신고
천주교는 33년 예수님이 만드신 교회고 개신교1~3 가운데 루터교는 1530년 독일 사람 루터, 성공회는 1534년 영국 왕 헨리 8세, 장로교는 1560년 프랑스 사람 칼빈이 만든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개신교의 뿌리는 천주교이며 상기 성삼위를 믿는 개신교를 또 다른 천주교(天主敎) 또는 일반적으로 기독교(그리스도교)로 칭하는 이유는 믿음 대상이 천주교를 세우신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 예수님과 일치하는 과정을 간과하거나 신앙인이기보다는 종교인으로 머물 때가 많은데 이 때에도 그러한 의문을 가질 수 있겠습니다.

이는 겉과 속이 다른 우리 내, 외면과 여러가지 환경을 만나는 순례 여정 또는 인생에 있어 그 자체를 얼마나 아름답게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그 아름다움이라는 실체, 속성 속에서 그것들을 얼마나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느냐가 관건이겠는데 이것은 또한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보여집니다.

예를 들어 이 때의 능동적이라 함은 자칫 너와 내 안의 주님 사랑을 도외시하는 독단 등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천주교인은 전례를 우선하기에 ''십자가 없는 예수''로 볼 수 있고 개신교인은 말씀을 우선하지만 ''예수 없는 십자가를 믿고 있다."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하여 그것들을 경계하며 새로운 겉과 속을 함양하고 화해 일치하는 신앙적 자세가 요청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번 성탄은 그동안 살펴온 적극적인 개신교인들, 수동적인 천주교인들을 하느님이 원하시는 사랑으로 이해하는 습관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필자는 다시 한번 함축적으로 임이 궁금해 하는 ''겉과 속''이라고 보여집니다.

예를 들어 순례라는 여정에 있어 행락객들이 보는 자연과 그 속성들, 피정객들이 보는 피정집과 그 뒷 모습이 유사한데 그 겉의 아름다움과 다른 속 모습(뒷 모습)들과 거기에 있는 내 자신은 어떠한 발자국을 남길까 돌아 보는건 어떨까요? 그 발자국을 바라보고 때때로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답을 구하는데 도움 되지않겠나 생각해봅니다. 거기에 또한 천주교인과 개신교인들이 함께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훗날 좋은 습관 하나되어 피아간 예수님을 초대할 수 있다면 성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편하지만 그 족적들로 인하여 무척 바쁜 사람 입장에서의 영적 전쟁시에도 영웅이 탄생되지요? 사람에 따라서는 영웅 모델도 좋치만 그 영웅이 예수님이 아니라며 다시 평범한 사람되길 원하는 사람도 생깁니다. 따라서 이번 성탄은 그 신성과 인성 하나되어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어떨런지요?

이 때의 사람들은 자칫 유흥 행락객들처럼 감상에 젖은 일부 피정자들처럼 기쁨, 환상등에만 젖어 아기 예수님을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2세가 갓 군에 입대하는 아빠의 마음과 산고의 엄마의 마음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간적 신앙 선배인 성모님의 산고보다 아기 예수님의 탄고가 더 아픔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음과 양이 있고 여와 남이 있으며 안과 밖이 있고 개신교와 천주교가 있다고 봅니다.

세상의 죄를 대신 구원하시기 위하여 금년 성탄에도 여지없이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가 단지 감상에 젖어 흥청망청 크리스마스를 즐기려는 사람들과 다른 성부의 아픈 속 마음과 성모의 겉 마음 등의 길을 위해 천주교, 개신교 분위기가 다른 것으로 이해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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