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이스라엘의 예언자, 오늘날의 예언자: 흥미진진한 드라마인 열두 소예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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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11-18 | 조회수7,761 | 추천수0 | |
[이스라엘의 예언자, 오늘날의 예언자] 흥미진진한 드라마인 열두 소예언서
드라마 같은 하나의 책
열두 소예언서는 열두 권이 하나의 책이다. 일찍이 예언서는 창세기의 ‘세 선조(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와 열두 지파’에 빗대어 ‘대예언자 세 분과 소예언자 열두 분’으로 편집되어 전승되었다(훗날 다니엘서가 추가되어 대예언서는 네 권으로 늘었다).
열두 소예언서 전체의 분량은 대예언서 한 권의 분량과 엇비슷하다. 그런데 열두 소예언서를 공부하기는 쉽지 않다. 열두 권이나 되는 책의 저작과 연대, 구성, 배경, 신학 등을 따로따로 배우자면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든다.
독일어권의 중견 구약 성경 학자 잡프(B.M. Zapff) 교수 신부는 최근 열두 소예언서 전체에서 ‘심판과 구원’이 되풀이되는 편집 틀을 제시하였다. 필자는 잡프 신부의 견해를 바탕으로, 열두 소예언서를 6회로 편성된 드라마처럼 서술해 보겠다. 독자들은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에 ‘심판과 구원’이 반복되면서 ‘회개’라는 중심 주제가 잘 녹아들었음을 발견할 것이다.
불륜 드라마에서 시작하여 재난 영화로
1회는 호세아와 요엘이다. 이 드라마는 가정의 불륜 이야기로 시작한다. 호세아의 아내 고메르는 남편을 배신했고, 호세아는 바람난 아내를 용서했다. 하지만 이 불륜 이야기는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이스라엘 사회를 강하게 비판하는 코드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느님을 배신했고(호세 4-5장), 회개하지 않았으며(6장), 바알을 섬겼다(7-8장). 기원전 8세기 후반기 북왕국의 호세아는 사랑과 정열의 하느님을 외쳤지만(11장), 우상에 빠진 이스라엘은 결국 심판받을 것임을(12-14장) 경고한다. 호세아서는 “마지막 경고”(14,10)의 말씀으로 끝난다.
바로 뒤이은 요엘서는 하느님의 심판이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정치적, 사회적 차원도 훌쩍 넘어서 아예 자연적 차원의 대규모 재앙이 될 것임을 외친다. 마치 최신의 ‘재난 영화’처럼 풀무치, 메뚜기, 누리, 황충 등이 모든 것을 먹어 치우고(1,4), 큰 가뭄까지 닥칠 것이다(1,12).
이 드라마의 1회는 구원의 희망으로 마무리된다. 백성이 재난 속에 하나 되어(2,16) 깊이 참회하자(2,12) 하느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어(2,18) 결국 재난을 멈추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풍족하고 잘 살게 될 미래를 약속하신다(2,19). 그렇다면 이제 인간의 죄와 심판을 누가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과연 이 “주님의 날”(1,15)은 실현될까? 호기심과 궁금증을 남긴 채 1회는 끝난다.
사회 비판 드라마는 국경을 넘고
2회는 아모스와 오바드야다. 아모스는 사회성 짙은 리얼리즘 드라마에 가깝다. 그는 가난과 부패, 불평등, 사회 정의 등의 주제를 제시한다. 호세아와 아모스는 스스로가 큰 사랑꾼이자, 사랑과 정열의 하느님을 외쳤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인물의 성격은 완전히 대비된다.
호세아는 바람난 아내를 참고 용서하는 등 약간 우유부단한 면을 보여 주지만, 아모스는 직설적이고 단호하다. 아모스는 신랄하고 날선 언어를 끊임없이 내뱉는다. 남왕국 출신이면서도(1,1) 북왕국에서 종횡무진 활약한 아모스는 요즈음 말로 ‘센 캐릭터’에 속하는데, 촌철살인의 명대사를 수없이 남겼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5,24)는 지금도 회자된다.
예언서 가운데 가장 짧은 오바드야서는 에돔의 심판을 언급하며 주님의 심판이 역사적이고 지리적으로 확장될 것임을 보여 준다. 하지만 오바드야도 시온 산에서 모두가 주님의 나라가 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끝난다(1,17.21). 이렇게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은 하느님 백성의 경계를 넘을 것이다. 그런데 2회의 드라마도 1회처럼 수많은 궁금증을 자아내며 끝난다. 과연 주님의 나라는 어떻게 실현될까? 다음 회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재미난 이야기
3회에 갑자기 요나가 등장한다. 사회성 짙은 이야기는 이제 ‘판타지 영화’ 같은 분위기로 바뀌어, 시청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요나가 니네베로 가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피하여 타르시스로 도망가며 이야기가 시작되고(1,1-2), 그는 “사흘 낮과 사흘 밤을”(2,1) 물고기 배 속에서 보내고 회개한다(2장). 그리고 세상의 중심 니네베를 회개시킨다(3장). 2회의 오바드야서에서 에돔으로 확장된 공간은 요나서에 이르러 저 멀리 니네베로 더욱 확장된다.
열두 소예언서 가운데 다섯 번째인 요나서는 이어지는 미카서와 함께 중심을 차지한다. 그리고 ‘회개’라는 핵심 주제를 제시한다. 그는 스스로 회개하여 삶의 방향을 틀었고, 저 멀리 큰 도시 니네베를 회개시켰다. 이제 시청자는 이 드라마의 주제가 회개라는 것을 명확히 알게 된다.
가난과 회개와 구원이 핵심 주제다
드라마의 4회는 미카다. 이야기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하지만 무대가 조금 변했다. 미카는 남왕국을 배경으로 활약한다. 남왕국의 미카와 북왕국의 아모스는 여러모로 비슷하다.
미카는 아모스가 제시했던 사회적 정의와 가난, 불평등 등의 주제를 되풀이한다. 또한 경고와 질타, 신탁, 소송, 논쟁적 화법 등을 다양하게 구사하며 위정자들과 위선자들을 거침없이 비판한다. 그도 촌철살인의 명대사를 수없이 쏟아낸다. 이런 반복을 통해서 시청자는 자연스레 신앙의 본질을 깨닫는다. 신앙이란 현실을 외면하고 천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고 참여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아모스와 조금 다른 점이라면 미카는 비판의 언어만큼 회개와 구원의 말씀도 풍부하게 말한다는 것이다. 그는 주님의 심판을 경고하지만,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4,3)는 말씀도 전한다.
재앙을 겪은 다양한 인물들과 희망의 건설
5회는 구성이 퍽 다르다. 3회와 4회는 각기 한 권의 책이었지만, 이제 배경과 성격이 다른 네 인물이 연속으로 등장하여, 심판의 재앙과 희망을 증언한다. 나훔, 하바쿡, 스바니야, 하까이가 그들이다.
5회는 완전히 국제적 스케일의 드라마다. 나훔은 달변가다. 알파벳 시편(1,2-8)과 역사적 신탁(1,9-2,3) 등을 다채롭게 노래하고, 신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의 심판을 묘사한다(2,4-3,19).
뒤를 이은 하바쿡서는 조금 소박하다. 하바쿡서는 주님께서 신바빌로니아인, 곧 칼데아인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임을 묘사한다(1,5-11). 만일 미래의 이스라엘 임금이 불성실하면(2.4-5) 이런 심판이 거듭될 것이다(2,6-20). 나훔서와 하바쿡서는 스타일은 다르지만 분량이 거의 같다. 그리고 저마다 초강대국인 신아시리아 제국과 신바빌로니아 제국도 주님의 심판과 구원 계획 안에 포함되는 존재임을 역설하는 공통점이 있다.
스바니야는 국제 정세에 휘둘리는 약소국 이스라엘의 신앙을 지적한다. 작고 약한 나라는 강대국 임금의 굳은 약속을 믿고, 강대국에 의지하여 안전을 보장받으려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런 ‘사대주의’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잘 드러낸다. 스바니야는 오직 믿을 것은 주님의 약속뿐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모든 것의 운명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새로운 창조의 날, 곧 주님의 날을 노래한다(1,2-3.14-18).
하까이는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는 시대에 살았다. 이제 시청자는 이 드라마의 결말이 가까웠음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하까이는 약간의 반전을 준비한다. 고대하던 귀환이 이루어졌지만 그 현실은 절대 녹록지 않았다. 귀환한 백성은 가난했고 이웃 민족은 협조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흉작까지 닥쳤다(2,16-19).
하까이는 신앙의 열성을 지니고 주님의 집을 재건하라고 독려하며, 결국 백성에게 용기를 되찾으라고 격려한다(2,4-5). 일제에 해방되었지만 오랫동안 혼란과 분열과 가난을 겪어야 했던 우리들이다. 희망이 성사되는 시각에 새로운 갈등이 싹튼 것이다. 5회를 본 시청자들은 이 백성의 드라마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사뭇 궁금할 것이다.
미래를 보며 메시아를 향하다
마지막 6회는 즈카르야와 말라키다. 이 둘은 저마다 구성이 비슷하기에, 6회와 7회로 떼어서 볼 수도 있지만, 지면의 한계 때문에 6회로 함께 보겠다. 이제 이 드라마의 시간대는 점차 미래로 향한다.
먼저 즈카르야는 옛 예언자를 인용하며, 현실을 고발한다(1-8장). 그리고 본격적으로 미래에 올 주님의 날을 묘사한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백성과 유다가 “한 씨족처럼 되고”(9,7),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이라고 선포한다(14,16-19). 그리고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분은 양떼를 돌보시는 선한 목자이시며(11,4-17), 겸손하시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며(9,9; 마태 21,5), 찔려 죽은 그분을 위해 여자들이 따로 곡할 것임을 예언한다(12,9-14).
말라키도 비슷하다. 귀환한 백성은 다시 죄에 빠졌다. 전례를 소홀히 하고(1,6-14), 다양한 부정을 저질렀다(2,17; 3,5). 이 드라마의 시청자는, 이 백성이 죄에 다시 빠지는 모습을 보며, ‘다시 죄에 빠지는 악순환이 영원히 되풀이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말라키는 미래에 도래하실 어떤 분께서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실 것을 암시한다. ‘말라키’라는 이름 자체가 “나의 사자”라는 뜻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말라키 예언서의 “보라, 내가 나의 사자(=말라키)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3,1)는 말씀을 인용하셨다(마태 11,10; 루카 7,27). 말라키는 결국 먼 미래에 오실 주님의 사자, 곧 메시아를 강하게 암시하며 열두 소예언서뿐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를 닫는다.
마지막 회까지 이 드라마를 ‘정주행’한 시청자라면, 다음 시즌에는 결국 메시아의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예고하며 열두 소예언서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다.
감사와 마무리
구약 성경의 책을 한 권씩 배워 나가는 전통적 방법은 훌륭하다. 그런 공부를 바탕으로 구약 성경이 어떻게 편집되었고, 신학과 종교의 흐름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쉽게 설명하는 일이 필요하다.
지면의 한계로 이 드라마의 세부 묘사나 신학적 의미 등을 많이 생략하여 안타깝지만, 이런 노력을 통해 열두 소예언서의 이야기와 의미가 우리 신앙인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길 희망한다.
*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고대 근동과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평신도 신학자이다. 주교회의 복음선교위원회 위원이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 위원이다. 저서로 「구약 성경과 신들」, 「신명기 주해」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8년 11월호,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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