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예수님 이야기89: 부활하시다(루카 24,1-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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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12-03 | 조회수8,339 | 추천수0 | |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89) 부활하시다(루카 24,1-12) 빈 무덤 보고도 부활을 믿지 못한 제자들
- 주간 첫날 여자들이 예수님이 모셔진 무덤을 찾았으나 무덤이 비어 있었다. 사진은 예루살렘 주님 무덤 성당 안 예수님의 빈 무덤 제대. 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제공.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중에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무슨 말씀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 부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간 첫날”(24,1) 곧 안식일 다음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죽음 그리고 돌무덤에 안장되는 것까지 지켜보았던 여자들, 곧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온”(23,55) 그 여자들은 향료와 향유를 준비해 새벽 일찍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무덤을 막아놓았던 돌이 굴려져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24,3)의 시신이 없어졌습니다. “여자들이 그 일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나타납니다. 여자들은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입니다.(24,1-5ㄱ)
황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입니다. 여자들은 안식일 전날 예수님이 돌무덤에 안장되시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좀 더 정성껏 모시고자 향료와 향유를 준비해 새벽 일찍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시신이 없으니 여자들은 대단히 당황했고 놀랐을 것입니다. 그때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 앞에 나타납니다. 눈부시게 차려입었다는 표현은 이들이 하느님에게서 온 천사들임을 나타냅니다. 구약성경에서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뵙고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이 빛났고, 백성들은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했지요.(탈출 33,29-30) 그래서 그 남자들을 하느님의 천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의 당황과 놀라움은 이제 두려움으로 바뀝니다. 마치 모세가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듯이(탈출 3,6), 여인들은 하느님에게서 온 이들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입니다.
그러자 두 남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러면서 갈릴래아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곧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24,5ㄴ-7)
두 남자의 말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이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는 하느님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여호 3,10 ;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판관 8,19). 천사들의 말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니까 그분의 시신을 여기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들은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부신 차림의 그 남자들이 갈릴래아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상기시켜 주자 그제야 여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 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예고하셨습니다. 두 번은 갈릴래아에서(루카 9,22; 9,44), 세 번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서였습니다.(루카 18,32-33) 이 여자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줄곧 예수님과 함께해 왔기에 세 차례에 걸친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 다 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현장에서 그 남자들의 말에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낸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이에게” 이 일을 알립니다.(24,9) 그 밖의 모든 이란 열한 제자와 함께 있던 다른 제자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여기서 무덤을 찾은 여자들의 이름을 밝힙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24,10)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안나, 곧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는 루카복음서에서 이미 나왔던 이름이지만(8,2-3),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는 처음 나옵니다. 이 마리아는 형제 야고보(마태 13,55)의 어머니로 예수님의 이모(요한 19,25 참조)라고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본지 2017년 8월 27일자 1429호를 참조하십시오.)
사도들은 여자들이 전하는 말을 헛소리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아마포만 놓여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일어난 일을 속으로 놀라워하며 돌아갔다”고 루카 복음사가는 전합니다.(24,11-12) 여자들의 말을 듣고도 사도들은 믿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달리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서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지만, 그 역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제대로 믿지 못합니다. 속으로 놀라워할 따름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께서 생전에 세 번이나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이야기하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아보기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주간 첫날”(24,1)이라고 전합니다. 오늘날 주간 첫날이라고 하면 월요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주간 첫날은 안식일 다음 날, 곧 토요일 다음 날로 일요일을 가리킵니다. 달력을 보면 제일 앞에 일요일이 나오는 것이 이를 말해 줍니다. 하지만 이 주간 첫날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날을 주님의 날 곧 주일(主日)로 여겨 거룩하게 지냈습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안식일과 결부되어 그리스도교에서는 주간 첫날을 주님의 날이자 휴식을 취하는 날로 지내면서 일요일이 쉬는 날로 보편화됐습니다. 물론 유다교에서는 오늘날에도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냅니다.
한 주간의 마지막이 아니라 첫날을 주일로, 주님의 날로 지낸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 삶의 첫 자리에 주님을 모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그리스도 신자들입니다.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루카복음이 전하는 이 부활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자들은 무덤만을 볼 수 있었고 베드로도 이를 확인했을 따름입니다.
루카복음서는 눈부신 차림을 한 두 남자, 달리 말하자면 하느님에게서 온 천사들이 여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음을 일깨워 주었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만 보면 여자들에게 말했다는 그 남자들은 어쩌면 허깨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천사들의 말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만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이미 갈릴래아에서부터 예고하셨던 그 말씀을 여자들에게 일깨워주었고, 여자들은 그 말씀을 기억해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여자들이 전하는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달려가서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했지만, 그 역시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기보다는 “속으로 놀라워하며” 돌아갔을 뿐입니다.
이렇게 믿지 않던 사도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을 힘차게 선포할 수 있었을까요? 우선은 물음으로 남겨두고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한 번쯤은 더 생각해 봅시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2월 2일, 이창훈 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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