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마르코복음 | 카테고리 | 성경 | ||
---|---|---|---|---|
이전글 | 복음의 시작부분(마르1,1-15) | |||
다음글 | 마르코 1,1-14 까지의 설명 | |||
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2-02-19 | 조회수624 | 추천수0 | 신고 |
1.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마르코는 이 복음을 시작하면서 "마르코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지 않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마르코가 이제부터 기록하는 내용은 마르코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기 때문이다. 비록 글로 기록한 사람은 마르코지만 그 내용을 기록하신 분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면 그분은 무슨 목적으로 마르코로 하여금 이 복음서를 기록하게 하셨는가? 그것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라는 것을 올바로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그동안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이 묵상서를 읽기 전에 내가 알고 있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자. 그리고 마르코가 전해주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를 비교해보면서 읽도록 하자. 마르띠니 추기경에 의하면, 마르코 복음서는 "예비신자를 위한 복음서"라고 한다. 아직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모르는 이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가르쳐 주는 교리서라는 것이다. 사실 이보다 더 좋은 교리서는 없다고 생각된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끝이 없는 일이다. 죽을 때까지 배우고 또 배워도 다 알 수 없는 분이 예수님이다. 다만 우리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시는 복음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만큼 알 뿐이다. 여러분은 마르코가 전해 주는 이 복음서를 읽고 묵상해 가는 동안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버린 무능하신 분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 계시고 내 안에서 역사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아드님하느님의 예수 그리스도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은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흔한 이름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일반적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만 생각했지 이스라엘 백성이 간절히 기다려 온 메시아(구세주)이시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스도는 예수님에 대해서 첫 번째로 덧붙여진 칭호이다. 이 말은 '메시아 즉 구세주'라는 뜻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려 왔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가 오셨지만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그분을 십자가형에 처하고 말았다. 우리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모를 때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을 것이다. 나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알아보는가? 복음 복음이란 "기쁜 소식" 이란 뜻이다. 왜 기쁜 소식인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성 예로니모는 "복음을 모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고, 성 바오로는 "복음이란 유다인들을 비롯하여 그리스인들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로마1,16)라고 말씀하셨듯이,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기쁜 소식인 것이다. 그리고 복음이 기쁜 소식인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시편에 "두루마리에 저에 대하여 쓰여 있나이다."(시편40,8)라는 말씀이 있다. 복음이 기쁜 소식 또는 놀라운 소식인 이유는 복음에 기록된 모든 내용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씌여진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서 씌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특별히 나를 위해서, 복음 전체가 나 자신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 다른 일반적인 책들과 크게 다른 점이다. 그래서 복음은 기쁘고 놀라운 소식인 것이다. 그 누구도 지금까지 나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 준 사람이 없었고 또 나도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복음이 나에 대해서 알려 주겠다는 것이다. 우선 이 점이 놀라운 소식이다. 복음이 '나를 위해서 씌여졌다" 는 것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복음이 나를 위해서 씌여졌다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복음을 알아야 한다. 그대는 정말 자기 자신을 아는가? 자신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고, 왜 이 세상에 왔는지를 아는가?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성서를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에게 써 보내신 한 장의 편지"라고 정의하였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는 그대에게 사랑의 편지를 한 통 써서 보내셨다. 사연이 아주 긴 편지 말이다. 예수님은 그대에게 매일 이 편지를 보내기를 거듭하신다. 복음은 예수님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말씀을 건네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읽어야 한다. 우리 안에 이런 확신이 서 있지 않는 한, 적어도 나에게 복음은 기쁜 소식, 놀라운 소식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복음이 "나를 위해서 씌여진 예수님의 편지" 라는 표현은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첫째, 나는 복음의 수신인이다. 즉, 복음은 나를 위해서 씌여진 것이기 때문에 복음의 수신인은 바로 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랑의 편지를 받아 보아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이다. 아무리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연애편지를 써서 보내신다 하더라도, 내가 그 편지를 읽어보지 않으면 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알 수가 없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의 과거를 알려 주시고, 또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나를 사랑하시고, 얼마나 나를 사랑하고 계신지를 당신 친히 기록하여 나에게 보내 주셨다. 어디 그뿐인가? 예수님은 나의 미래까지 기록해 놓으셨다. 따라서 복음을 잘 알게 되면 나의 미래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나의 미래가 궁금한가? 그러면 복음을 보라. 거기에 모든 것이 다 기록되어 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될 것인지가 모두 기록되어 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래서 복음은 놀라운 소식이다. 따라서 내가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알고 나도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려면 사랑의 편지인 복음을 읽어야 한다. 복음은 2천 년 전에 씌여진 나와 무관한 소식이 아니라 오늘 나를 위해서 쓰신 사랑의 편지이다. 둘째, 예수님은 나의 답장을 기다리신다. 예수님이 나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셨다면, 그분이 나에게서 답장을 기다리신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보내 놓고 그 답장을 기다리는 심정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은 마치 집을 나간 작은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아버지처럼 매일 우체부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오늘도 또 내일도 그분은 나에게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이제 답장을 써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그래서 그분은 "오늘 너희가 그분 목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히브 4,7) 고 말씀하신 것이다. 작은아들이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제 정신이 들어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라고 마음을 고쳐먹고 아버지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듯이, 이제는 내가 아버지의 집으로 발길을 돌릴 차례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아버지께 돌아가자. 그러면 그분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17-20) 라고 작은아들에게 하셨듯이, 당신에게 돌아오는 나를 보시고 달려와 나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어 성대한 잔치를 차려 주실 것이다. 시작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이라고 할 때의 "시작" 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Arche'(아르케)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1) 원리, 기원(Principium) 2) 주도, 선도 (Initium) 3) 기초, 토대 4) 본질, 핵심 등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이라는 말씀은 단순한 시작이 아니다. (1) 나의 생명의 기원이신 예수님 내 생명의 기원은 어디인가? 나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기쁜 소식의 기원은 어디인가? 요한 복음사가가 "모든 것은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3-4) 라고 적었듯이, 모든 생명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기 때문에 모든 생명의 기원은 말씀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나의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이요, 하느님에게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생명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창조주이시고 주인이시며, 우리는 그분에 의해서 만들어진 피조물, 즉 그분에게 종속되어 있는 존재라는 관계가 설정된다. 이것은 영원토록 변치 않는 불변의 진리이다. 그래서 요한 복음사가는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도록 해주셨다."(요한5,26) 라고 하셨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1요한 5,12) 라고 한 것이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 이라는 말씀은 단순한 시작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내 생명의 기원이시며 시작이신 분" 이심을 알려 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예수님을 아는 것은 나의 뿌리를 알게 되는 것이요, 내 생명의 원천이 어디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에게서 왔다."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위대한 진리를 마르코 복음을 묵상하면서 알게 되고 점점 더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2) 나의 구원의 시작이신 예수님 '시작'(아르케)이라는 단어는 구약성서의 첫 장인 창세기를 기록할 때 "한 처음에" 라고 제일 먼저 사용한 첫 단어이다. 영어로 창세기에서는 "In the beginning"이라고 하였고 마르코는 "The beginning of the Good News"라고 하였다. 따라서 '시작'이라는 아르케는 구약성서의 첫 번째 단어이며, 4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씌여진 마르코 복음서의 첫 번째 문장에 사용된 단어이다. 구약의 첫 장을 열었던 '아르케'(한 처음에) 라는 단어와 신약 4복음서의 첫째인 마르코 복음의 첫 장을 열고 있는 '아르케'(시작) 가 똑같은 단어라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출처:유광수 신부의 복음묵상1 / 다가오시는 예수 |
||||
태그
|